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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문장을 그리다] #1 프란츠 카프카, "꿈", 배수아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4, p.99 편집자주 : 문장에서 마주한 영감을 이미지로 표현하는 작업, '문장을 그리다' 입니다. 새롭게 '리카'님이 이 그림의 주인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림과 문장에서 각각 발견할 수 있는 '느낌'을 함께 누려보시길 바랍니다. by 리카 그래도 어쨌든 당신이 지금 없다는 사실이 기뻤습니다.그런데 당신이 거기 없다는 것은 나에게 또한 아픔이기도 했습니다. 그 아픔에 대한 위로로, 나는 승객이 잊고 간 서류가방 하나는 발견했습니다. 내 주변을 둘러싼 다른 승객들이 놀라서 바라보는 가운데, 나는 그 조그만 가방 속에서 아주 커다란 옷가지들을 끄집어 냈습니다. 밀레나 예잔시카에게, 1920. 8. 10. M 206 프란츠 카프카, "꿈", 배수아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4, p.99 더보기
[3인의 현상범들] #3 말하자면 말입니다 [학곰군.txt]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아버지였다. 나는 짐짓 슬픈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잘 되고 있니? 네? 그냥 그렇죠. 일부러 고개를 떨구었다. 아버지의 그림자가 보인다. 검은색. 아니 그보다는 흐린, 너무 많은 붓이 오고가서 이제는 수심을 알 수 없는 물통의 색 같은 그의 얼굴이 있었다. 너의 쓰임이 있을 곳이 있을 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머리가 아버지의 그림자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영영 나오지 못할 것처럼 그대로 멈춰버렸다. 벗어날 수 있을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세상에 쓰임이 있는 곳이 있을까. 아버지도 한 때는 가슴에 광활한 대지를 품고 무작정 앞으로만 달려가던 때가 있었다고 말한다. 네 나이 때는 하늘을 품어도 모자라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러나 잘 될 것이라는 말을 하며.. 더보기
[3인의 현상범들] #2 아버지를 위하여 [소르피자.txt] “이제 선택해야 할 시간이야.”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얀색의 폰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수백 수천 게임을 치러왔다. 많은 선택들이 그의 머리를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시작한 지 세 번째 순서 만에 E7칸에서 나이트에게 잡혔던 기억, 자신을 희생하면서 상대방의 흑색 퀸이 잡혔던 일, 상대편 진영에 끝가지 가서 백색 퀸으로 승급한 자신의 동료를 본 기억도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게임을 치러오면서 그는 지쳐버렸던 것이다. 게임을 이겨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기사를 위해, 주교를 위해, 여왕에게 길을 터주고 왕을 지키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승급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 순서는 그에게까지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늘 게임에서 그는 드디어 상대방 진영에 도달한 것이었다. “어떤 것으.. 더보기
[오래된 현재] #1 교보문고와 청계천 헌책방 거리 2016년 3월 11일, 서울 지하철 4호선 동대문역 8번 출구 부근 현대시티 아울렛에 대형서점 하나가 입점했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브랜드 '교보문고'다. 방문객들에게 동대문은 주로 패션의 집결지로 여겨졌는데 서점이라니, 의외였다. 깔끔하게 꾸며진 아울렛 한 편에 자리잡은 서점은 금세 성공했다. 오픈 첫 주말부터 방문객이 몰렸다. 하긴 동대문에는 꼭 옷가게만 들어가란 법은 없지. 책 읽을 곳이 많은 건 좋은 거니까. 이야기를 넘기기 전에, 한 가지 더 의외의 사실이 있다. 교보문고가 입점하기 57년 전에 이미 동대문엔 책방 거리가 있었다. 교보문고와 1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이웃하고 있는 곳이다. 이름하여 '청계천 헌책방 거리'. 이들을 만나기 전에 먼저, 교보문고의 매끄러움을 잠시 들여다보자. 추.. 더보기
[오래된 현재] #프롤로그 거리에서 발견한 우리네 삶 안녕하세요, 별밤에서 ‘by 건’이라는 이름을 달고 글을 쓰는 건입니다. 언젠가부터 제가 드라마 말고도 세상 이야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저곳에선 무슨 일들이 일어날까, 그 한복판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종종 궁금해 하곤 하죠. 어떤 장면, 사건, 배경, 인물에 관심을 갖는다는 건 사실 좋은 일이잖아요? 그것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고, 때론 진실을 찾아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당장 눈앞에 닥친 일들로 인해 우리는 내 삶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를 장면들을 놓쳐버리곤 합니다. 우리의 삶은 의외의 사소한 지점에서 자주 바뀌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그래서 저도 제 삶에 ‘사소하지만 중요할 의외의 지점’을 만들어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거리로 나가기로 했어요. 요즘 저는 .. 더보기
[3인의 현상범들] #1 기억할 만한 지나침 [호래.txt] 사실 너의 불행에 그리 큰 관심이 없었어. 미안. 생각해보면 널 안 지 그렇게 오래 되지도 않았잖아. 그 말이 나왔을 때 나도 뭐라고 말해야할지 고민했어.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힘들었겠다고 말할까. 나는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지. 너는 그런 나의 태도에 실망했고. 하지만 사실 네 부모님이 작년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 기회조차 없었잖아. 그러니 미안하다는 말도 어울리는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위로의 말을 내뱉으며 너의 한쪽 손을 잡을까도 생각했지만, 그 위로의 말과 몸짓이 스스로도 너무 가볍게 느껴지면 어쩔까 두려웠거든. 원래 나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위로하는데 어려움을 느껴왔어. 섣부른 충고는 주제 넘는 행동같고 기계적인 위로는 위선같다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사실 그리 큰 관심.. 더보기
[3인의 현상범들] 모든 것의 시작 * 안녕하세요, 별밤에서 ‘벼’를 맡고 있는 벼입니다. 제가 최근에 필름카메라라는 요물에 맛이 들려서 이곳저곳에서 이것저것을 찍고 돌아다니는데요. 최근 특이한 경험을 하나 해서 말이죠. 다들 아시겠지만 필카는 디지털카메라와는 달리 현상라는 작업을 (무려 현상소에 직접 찾아가서) 거치기 전까지는 사진이 어떻게 나올지 ‘가늠’조차 할 수 없습니다. 아, 물론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눈앞에 있는 이미지(기왕이면 애인이 좋겠죠)를 카메라 속에 담아내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하는 작업이야말로 필카의 정수라는 점은 분명하니까요. 다만 제가 ‘가늠조차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과 현상된 사진을 볼 때까지의, 그 사이의 무지막지한 간격을 표현한 것이다, 이 정도로 너그럽게 .. 더보기
제천국제음악영화제(JIMFF), 한여름의 끝자락이고 싶었던 하루 여행 # 지금으로부터 10개월 전, 건으로 불렸던 ‘나’는 인생 첫 영화제였던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친구 ‘벼’와 ‘락’과 함께 했던 2박3일은 즐거웠다. 시간이 흘러 다들 각자의 인생을 사느라 바빴던 8월, 나는 본의 아니게 또 다른 영화제 방문기를 쓰고 있다. 그것도 다른 이와 함께. 감회가 새롭다. 블로그 유일의 여행기가 영화제로 쓴 것인데 두 번째도 영화제라니, 반갑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Jecheon International Music & Film Festival, JIMFF)는 12회를 맞은 나름 역사가 있는 축제다. 마침 광복절을 맞은 나와 ‘영’은 즐거우면서도 기억에 남을 시간을 보내기 위해 제천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음악’과 ‘영화’는 따로 떼어도 흥미롭지만 함께라면 더욱 매력적인 존재이.. 더보기
부산국제영화제(BIFF) 여행기 3막 2박 3일의 부산국제영화제 여행이 끝났다. 마지막 여행기는 각자 써보기로 했다. 그만큼 할 말도 많을 테니까. 세 명의 이야기를 세 장으로 나눠봤다. 3막 1장(by 락) #1 숙소 커피를 마셔서 그런지 밤새 잠이 오지 않았다. 건은 이미 꿈나라다. 벼와 함께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니 영화채널에서 이 막 시작됐다. 3편의 영화를 보고 질릴 법도 한데 뭔가에 이끌리듯 4번째 영화를 보고 말았다. 배우 김성균의 섬뜩한 눈빛을 따라가다 보니 영화를 어느새 끝났다. 4시 반이다. 같이 보던 벼도 잠에 들었다. 옆방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서인지, 부산에서의 마지막 밤이 아쉬워서인지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 어쩌면, 커피를 마시지 않았어도 잠이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시계 추 소리를 자장가 삼.. 더보기
부산국제영화제(BIFF) 여행기 2막 #1 롯데시네마 매표소 앞 10시다. 여유 있게 왔다고 생각했는데 영화관은 사람들로 붐볐다. 10시 영화를 예매한 사람들은 왜 자동화 기기로 영화표를 뽑을 수 없냐며 볼멘소리를 냈다. 한 아주머니는 거센 부산 사투리로 이게 말이 되냐며 따졌다. 나 같아도 어렵게 예매한 영화를 제때 못 보면 열 받을 것 같다. 곱상하게 생긴 서울 말씨의 자원봉사자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며 해명했다. 아주머니도 알 것이다. 그에겐 잘못이 없다는 걸. 우리는 10시 반 영화라 그 대열에 합류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은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일간지 형태로 무료로 배포되고 있었다. 공식일간지라는 수식어 뒤의 은 어색했다. 상영 시간이 남아 잡지를 보는데 볼거리가 많다. 우리의 첫 영화는 디판이다. #2 롯데백화점 푸드코트 영화를 본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