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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푸디세이아

[푸디세이아] 9. 우동집에서 우동을 팔지 않았다 한동안 마음의 빚처럼 묵혀뒀던 감정들이 걸려 낮잠을 자고 광장에 간다. 공기는 쌀쌀하고 인파는 예전보다 많이 줄었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끝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한참 타오를 때는 가보지 못 했던 효자동을 찍고 광화문을 돌아 안국으로 간다. 매번 익숙한 그 길들이지만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행진의 서두에서 사람들은 캐럴을 부르고, 여기저기서 산타 모자를 쓰고 다닌다. 생각해보니 크리스마스이브다. 이브 저녁 이곳저곳을 쏘다니니 저녁때를 놓친다. 안국에는 좋아하는 우동집과 냉면집이 있고, 제법 괜찮다 생각하는 만둣국 집과, 무난한 라면집과 해장국집이 있다. 날이 추워 눈앞의 냉면집을 지나치며 라면이나 먹으려다, 갑자기 카레 우동이 끌려 발걸음을 옮긴다. 이미 18000보 가까이 걷고 난 뒤다. 작은 우동.. 더보기
[푸디세이아] 8. 종강 후의 치맥은 달다 사소한 일로 아침부터 한바탕 설전을 벌이고 1시간에 걸쳐 공연을 (비록 좋진 않은 자리지만) 예매를 하고 시험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고 를 봤더니 기분이 어린왕자 속 보아뱀 - 혹은 모자로 보이는 무엇 - 마냥 유려한 곡선을 따라 오간다. 끝났으니 행복해야겠지만, 영화관을 나서니 역설적으로 이젠 진짜 비빌 언덕이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연말까지 읽겠다고 빌린 책은 가방을 채우다 못해 터질 것만 같은데, 설상가상 영화를 보고 나오니 처량하게 비까지 온다. 뭔가 쏟아질 것 같은 날이다.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벼 형을 만난다. 무한리필 삼겹살집 2곳과 양꼬치집을 갔지만 어딜가나 사람은 바글바글하기에 우리가 머물 ‘자리’가 없다. 사람에 치여 치맥이나 하자고 찾아간 치킨집은 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 더보기
[푸디세이아]7. 만두, 만두, 만두 미친 듯이 바빴던 한 주가 끝났다. 근데, 앞으로 더 바빠진다는 것이 함정. 삶을 시험에 들게 하는 시험들로 삶이 가득하니, 통탄을 금할 길이 없다. 그래도 만두로 가득했던 한 주 이야기를 짧게나마. 1. 16. 11. 28. 저녁 7시. 경향신문사 앞.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도통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덜컥 들은 철학 수업 덕분에 앎과 지식으로 마음은 풍성해졌지만 몸은 피폐해졌다. 생각해보면 이 날은 수업까지 다 듣고 나서 학교까지 다시 소환됐으니, 더더욱. 다만 아무리 지치고 힘들 때도 틈이 나면 밥은 꼭 챙겨먹으므로 근처 굉장히 낡고 허름해보이는 분식집을 찾아 들어갔다. 왠지 “쏘울”이 넘칠 것이란 기대와 함께. 현금만 받지만, 밥값이 채 오천원이 넘지 않는 식당에서, 괜시리 아무 것도 없지만 .. 더보기
[푸디세이아] 6. “말아 먹는” 대신, 따로 운수가 나쁜 날이다. 마음먹고 밤을 새려다가 애매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잠만 못 잤다. 2박 3일 혼자 잠까지 줄여가며 끙끙대며 준비한 글은 방향이 틀렸으니 오는 금요일까지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한다는 얘기나 들었다. 마음이 급하니 캔 커피 하나가 점심이 됐고, 그 사이 트럼프는 대통령이 됐다. 뜬금없이 세계의 끝을 생각하며 지쳐 집에 가는 길, 하필이면 노트북을 버스에 놓고 내리는 바람에 다시 추운 가을 밤 타고 온 버스를 찾아 한참을 헤맨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만 같은 하루가 지나간다. 피곤에 절어 집에 가는 길, 간만에 마음이 동해서 긴긴 귀로 중간을 끊어 밥집에 간다. 정말 좋아했던 국밥집이 사라진 지금, 항상 그대로일 것이라 기대하며 갈 수 있는 식당은 이제 몇 개 .. 더보기
[푸디세이아] 5. 학교 앞 멸치국수, 오뎅 추가 벌써부터 머릿속이 온통 낯선 경제학자들과 정치학자, 정당 관련 이론들과 제도경제학적, 정치인류학적 내용들로 포화가 되기 시작한 한 달이다. 바빠져야겠다고 스스로 무덤을 판 결과라 어디 누구한테 딱히 하소연할 곳도 없다. 공부를 하고 지식을 쌓는 일은 빠져들면 진심으로 재밌는 일이지만 부끄럽게도 꾸준히 앉아 뭔가를 공부해본지가 너무 오래된 일이라 사실 사는 것이 영 만만하지가 않다. 지금의 삶과는 달리, 머릿속에서 딱딱 정리가 깔끔하게 돼 있는 기분을 선호하는데, 뭔가를 정리하기도 전에 책장이 와르르 쏟아져 내려오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그 때문일까. 아침 수업이라 아침을 먹고 출발해도 수업을 다 듣고 나면 배가 고파 꼭 빵을 한두 개를 사먹는데, 오늘은 그럼에도 여전히 배가 고프다. 설상가상으로 망중한이.. 더보기
[푸디세이아] 4. 나는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채로 독일. 맥주. 혼자. 항상 마음속의 이상향을 그리며 어디론가 떠나려고 하지만 정작 몸이 묶여 있을 때가 많다. 대개는 금전적 문제였지만, 금전적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자 이제는 마음이 닿는 목적지가 없다. 답답할 때마다 내일로 티켓을 끊고 어디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일 없이 바삐 몸을 놀려 기어코 반도를 이리저리 헤집어 놓는 방식으로 여행을 가는 것 역시 채울 수 없는 방랑벽이 주는 헛헛함, 그 때문이다. 반도인(半島人)은 외롭다. 김연수가 말한 ‘국경’의 정의 아래의 나는 제대로 된 일탈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에, 진정한 의미의 ‘여행’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후일담을 들어보니) 출장차 워싱턴과 멕시코와 쿠바로 떠나셨던 교수님이 시험을 한 주 빨리 보신 탓에 주.. 더보기
[푸디세이아] 3. 유진과 낙원 안국에서 낙원상가, 명동까지 이어지는 길은 묘한 분위기들이 서로 중첩돼 있는 공간이다. 자본주의 문명의 정점과 철 지난 과거 사이로 수많은 시간이 지나간다. 천도교 본당과 운현궁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대로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가면 그 어디서도 보기 힘든 풍경들이 펼쳐진다. 거리를 걷는 대부분의 이들이 노인들이다. 장기 두는 이들과 서예 글씨를 쓰는 사람들 주위로 수많은 노인들이 모인다. 노인들이 다른 연령층보다 월등히 많은, 이 다소 기이한 풍경은 어쩌면 내가 아는 낙원의 매우 작은 조각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 특수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낙원상가 주변은 주변의 비싼 물가를 감안해보면 상당히 저렴한 편. 송해 ‘선생님’이 자주 들린다는 2,000원 남짓 국밥집들이 좁은 골목길을 끼고 쪼르르 모여 앉아있다.. 더보기
[푸디세이아] 2. 필사의 계절, 따뜻한 빵이 건네는 위로 게으르고 머리 나쁜 이가 결과물에는 항상 마음이 쫓겨서 시험기간에는 으레 중세의 민머리 수도사들 마냥 뻘뻘거리며 필사를 한다. 눈이 글을 담지 못하니 손으로나마 우겨넣을 뿐이다. 불안한 만큼 꾹꾹 눌러 담느라 샤프심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항상 똑, 하고 부러져 책상 주변엔 그 잔상들이 항상 포연 뒤 빈 탄피마냥 가득하다. 조급한 마음이 터질 듯해서 바람을 쐬러 나갈 때면 팔뚝과 손가락 마디가 욱신거린다. 벌겋게 달아오른 손가락이 똑 마음을 닮았다. 항상 턱에 받쳐야 폭식하듯 하니 공부가 어느 정도 됐단 것을 깨닫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되어버렸다. 백야와도 같은, 망각과 기억 사이의 불안이 오히려 안심할 수 있는 척도가 된 역설적 상황에 시험기간은 항상 서릿발 같다... 더보기
[푸디세이아] 1. 지치고 힘들 땐 라멘 생각해보면 뭣도 모르는 아이였을 때부터 사골국을 좋아했다. 그 어린 나이 때부터 애늙은이였던 나는 - 집 형편에 맞게 대부분 잡뼈였지만 - 그게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두 사발씩, 세 사발씩 들이켰다. 한 번에 푹 끓여 일주일을 내내 놓고 먹어도 딱히 질린다는 생각마저 안 들었다. 그때는 왠지 모르겠지만 뼛국에는 칼슘이 많다는 말이 정설처럼 여겨질 때였으니, 알게 모르게 마실수록 뼈도 튼튼해진다는 플라시보 효과도 알게 모르게 있었던 것 같다. (슬프게도 곰국에는 단백질과 지방 밖에 없다는 것이 정설.) 사실 사골국을 좋아한 가장 큰 이유는 먹고 나서 느껴지는 든든함, 이라는 느낌 때문이다. 오랜 시간을 들여 푹 삶아낸 뽀얀 국물은 왠지 모르게 먹고 나면 기운이 나는 느낌이 들었다. 곰탕집에서 내주는 아삭아.. 더보기
[푸디세이아] 0. 감각 잃은 세계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 앞서 한 가지 사소한 고백을 하자면, 손가락 끝에 감각이 없어져 가는 듯한 착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미뢰 역시 동일한 영향을 받고 있는 듯한 눈치구요.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모든 감각이 그대로 살아있지만, 그것이 내 뇌까지 실제로 전달되는지에 대해 스스로 확신이 없다는 느낌이랄까요. 손가락 끝을 열심히 깨물어보면 분명 아픈 것이 느껴지지만, 그것이 실제로 아프다고 느끼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기억으로 그 모든 감각들을 재현하고 있지만 그것이 ‘실제 현재 내가 느끼는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것이죠. 네, 맞습니다. 어떤 믿음도 없습니다. 내 자신의 감각조차 믿지 못하게 된 순간엔, 믿을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