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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3인의 현상범들

[3인의 현상범들] #번외 모(부)성 [호래.txt] 나는 고양이를 좋아한다. 고양이는 나를 싫어한다.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만나 온 고양이는 그랬다. 후미진 골목이나 길가에서 마주친 고양이들은 모두 내게 관심이 없거나 나를 무서워했다. 집에서 고양이를 한 번도 길러본 적이 없는 나는 고양이를 만나면 어쩔 줄 몰라 했고 고양이들은 그런 내가 어색한지 나를 항상 피했다. 그런데 바로 어제, 편의점에 가려고 밖으로 나섰다가 복도에서 작고 귀여운 고양이를 발견했다. 그 고양이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지 내게 먼저 다가와 다리에 얼굴을 비비며 애처롭게 울었다. 나는 고양이가 배가 고파서 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얼른 집으로 뛰어 들어가 고양이한테 줄 만한 것을 찾았다. 하지만 나도 먹을 것을 사러 편의점에 가려던 참이라 고양이가 먹을 .. 더보기
[3인의 현상범들] #9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학곰군.txt] 1.자유주제로 뭔가 길게 쓰고싶어 일단 번호를 붙인다. 2. 아 벌써 2번이다. 뭐 한 것도 없는데 두 번째 차례다. 그래. 포인트는 뭐 한 것도 없는데로 가볼까. 마땅히 할 말도 없었는데 잘 되었다 싶다. 3. 시작은 두산베어스 모자로부터다. 나는 2006년. 에스케이 와이번즈가 파랑에서 빨강으로 색을 바꾼 그 해 문학구장에서 모자를 샀다. 야구장을 처음 간 그 날 그래! 이왕 야구장에 온 것 모자라도 사야겠지 않겠는가 싶어서 원정 구단 간이 매점을 기웃 거렸고 지금도 쓰고 있는 네포스 두산베어스 모자를 6천원 주고 샀다. 모자의 나이도 벌써 10살. 비를 피하지 않는 주인 덕분에 비며 눈이며 미세먼지까지 온전히 들이마시더니 노화가 왔는지 색이 티미해졌다. 그렇지만 군청ㅡ노랑의 앤티크.. 더보기
[3인의 현상범들] #8 민감하다 [소르피자.txt] E주임은 점심을 먹은 뒤 사무실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그는 갑자기 보도블록에 걸려 넘어졌다. 까끌한 면에 손이 쓸려 생채기가 났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덤덤히 손을 털고 일어났다. 보도블록에 떨어져 있는 벚꽃잎들. 그는 자신이 걸려 넘어진 것이 벚꽃을 보느라 한 눈을 팔아 생긴 일이라 생각해 괜스레 벚꽃나무를 발로 한 번 걷어찼다.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경기가 좋지 않았다. 사기업에 다니는 자신의 친구들은 작년에 성과급을 받지 못했다고 투덜댔고, 얼마 전 있었던 설날에도 상여금이 작년보다 곱절은 더 줄었다며 그에게 하소연했다. 하지만 E주임은 그런 말을 들어도 와 닿는 것이 없었다. 자신처럼 나라의 녹봉을 받아먹는 공무원쟁이들은, 늘 일정한 봉급을 받고 하던 일만 하면 됐기에 성과급.. 더보기
[3인의 현상범들] #7 위대한 허구 [호래.txt] 사진가는 창문을 찍을 수 없다. 만약 낮-실내에서 창문을 찍으면 창문 밖 풍경이 카메라에 담길 것이고, 사람들은 그 풍경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창문을 통과한 이미지라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만약 창문에 찍힌 지문이라든지, 창문에 비친 형광등을 사진에 담아 이것이 창문을 통과한 이미지라는 것을 알아채게 만든다면 사람들은 직접 현장에 뛰어들지 않고 안전한 실내에서 사물을 담으려는 작가의 태도를 질책할 것이다. 반대로 밤-실내에서 창문을 찍으면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찍힐 것이고, 사람들은 이를 자화상이란 의미로 해석할 것이다. 그렇다면 불투명한 창문은 대안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불투명한 창문이란 그 자체로 창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창문’ 그 자체를 사진에 담.. 더보기
[3인의 현상범들] #6 세계의 끝 [학곰군.txt] 넌 놓치고 있어.뭐를?사진에서 뭐가 보이느냔 말이야.말했잖아. 또라에몽.그것 뿐이야?뭐 쌓인 책들도 있고 오묘한 나무 그림도 있고.그뿐이냐고!왜 갑자기 지랄인데. 뭐 어쩌란거야.정말로 그것밖에 안 보여?응. 귀신이라도 보이냐 너는?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뭔데 그럼.그을렸잖아.그게 뭐.그게 뭐라니. 그을렸대두?아니 그게 뭐 어쨌다고.이게 안 보인다며!그깟 그을음이 뭐가 중요한데?뭐가 중요한 지도 모르는 건 너야.미친놈이. 개소리 할 거면 말 걸지마.볼 수 있는 것도 못 보면서 뭐가 잘났다고 큰 소리 치는 거야.그깟 그을린 자국 때문에 이 지랄을 하는거야? 뭔데 썅. 들어나보자.봐. 잘 들어봐 알겠니?설명이나 해.알았어. 봐. 사진은 누가 자를 대고 자른 것처럼 똑바르게 그을린 자국이 .. 더보기
[3인의 현상범들] #5 실패작 [소르피자.txt] 이것은 에어컨이다. 이것은 히터다. 이것은 둘 다 될 수가 있다. 지름이 30센티도 안되어 보여 약할 것 같지만, 이 작은 기계 하나만 건물에 있어도 모든 층에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과, 겨울에는 따뜻한 바람을 제공해줄 수 있다. 누군가는 이것을 보고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사우론’이라 말할 지도 모르겠지만, 이는 기술혁신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나 하는 말이다. 그런 자가 있다면 더운 여름날 옥상에서 ‘사우론’을 닮은 메론 맛 눈깔사탕을 빨아먹으며 그 사탕이 입에서 녹을 때까지 엎드려뻗쳐를 하고 그것이 끝나자마자 호빗처럼 맨발로 63층 건물을 계단으로만 내려와야 할 것이다. 밑 부분은 왜 녹색으로 칠해져 있냐고? 아 그건, 여름이 너무 더워서 옥상에 있던 우레탄이 녹아 .. 더보기
[3인의 현상범들] #4 이름 없는 화가 [호래.txt] 술을 마셔서 정신이 조금 멍한 상태로 나는 지금 눈앞에 있는 그림을 보고 있다. 그림에는 검은 선이 몇 개 있는데 도대체 무엇을 그린 건지 모르겠다. 섬 같기도 하고 산 같기도 하고. 바다 같기도 하고 육지 같기도 하다. 화장실을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나는 그 그림 앞에 멈춰 섰다. 굉장히 관심 있는 사람처럼 그림을 보고 있지만 사실 그림엔 별로 관심이 없다. 무엇을 그린 지도 알 수 없는 그림 따위 봐서 무얼 하나. 그냥 술자리엔 바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데 분위기 맞추며 앉아 있는 건 고역이다. 개새끼들 그냥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술을 마시면 나는 조금 더 감정에 솔직해 진다. 아니다. 지금 이 감정은 어딘가 과장된 면이 있다. 사실 걔네들은 나한테 .. 더보기
[3인의 현상범들] #3 말하자면 말입니다 [학곰군.txt]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아버지였다. 나는 짐짓 슬픈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잘 되고 있니? 네? 그냥 그렇죠. 일부러 고개를 떨구었다. 아버지의 그림자가 보인다. 검은색. 아니 그보다는 흐린, 너무 많은 붓이 오고가서 이제는 수심을 알 수 없는 물통의 색 같은 그의 얼굴이 있었다. 너의 쓰임이 있을 곳이 있을 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머리가 아버지의 그림자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영영 나오지 못할 것처럼 그대로 멈춰버렸다. 벗어날 수 있을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세상에 쓰임이 있는 곳이 있을까. 아버지도 한 때는 가슴에 광활한 대지를 품고 무작정 앞으로만 달려가던 때가 있었다고 말한다. 네 나이 때는 하늘을 품어도 모자라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러나 잘 될 것이라는 말을 하며.. 더보기
[3인의 현상범들] #2 아버지를 위하여 [소르피자.txt] “이제 선택해야 할 시간이야.”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얀색의 폰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수백 수천 게임을 치러왔다. 많은 선택들이 그의 머리를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시작한 지 세 번째 순서 만에 E7칸에서 나이트에게 잡혔던 기억, 자신을 희생하면서 상대방의 흑색 퀸이 잡혔던 일, 상대편 진영에 끝가지 가서 백색 퀸으로 승급한 자신의 동료를 본 기억도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게임을 치러오면서 그는 지쳐버렸던 것이다. 게임을 이겨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기사를 위해, 주교를 위해, 여왕에게 길을 터주고 왕을 지키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승급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 순서는 그에게까지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늘 게임에서 그는 드디어 상대방 진영에 도달한 것이었다. “어떤 것으.. 더보기
[3인의 현상범들] #1 기억할 만한 지나침 [호래.txt] 사실 너의 불행에 그리 큰 관심이 없었어. 미안. 생각해보면 널 안 지 그렇게 오래 되지도 않았잖아. 그 말이 나왔을 때 나도 뭐라고 말해야할지 고민했어.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힘들었겠다고 말할까. 나는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지. 너는 그런 나의 태도에 실망했고. 하지만 사실 네 부모님이 작년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 기회조차 없었잖아. 그러니 미안하다는 말도 어울리는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위로의 말을 내뱉으며 너의 한쪽 손을 잡을까도 생각했지만, 그 위로의 말과 몸짓이 스스로도 너무 가볍게 느껴지면 어쩔까 두려웠거든. 원래 나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위로하는데 어려움을 느껴왔어. 섣부른 충고는 주제 넘는 행동같고 기계적인 위로는 위선같다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사실 그리 큰 관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