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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

삶과 기억을 지탱하는 ‘도시의 맛’ [리뷰] 트빌리시 조지아는 굴곡의 땅이다. 몽골부터 러시아에 이르는, 수많은 시간으로 반복된 외침 속에서 그들이 겪었을 고통의 무게를 우리는 감히 체감할 수 없다. 트빌리시, 낯선 이국의 먼 도시의 이름은, 그렇게 아픔으로 쓰인 채 우리 앞에 베일을 벗는다. 그러나 그 무한의 고통은 그들의 삶을 파헤치지도, 무너뜨리지 못했다. 그들은 오히려 그 삶을 꿋꿋이 버티고 이겨내, 낯선 이국의 우리 앞에 고통을 넘어선 삶의 무게를 보여준다. 바로, 그들의 요리를 통해서. 이 담아낸 낯선 도시 트빌리시는 생각보다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스스로를 ‘코스모폴리탄’적이라고 칭하는 그들의 삶에는, 먼 몽골로부터 묻어온 동양의 향취와 이방인들이 그토록 지우려고 했던 그들 자신의 무게가 함께 담겨있다. 조지아는 수많.. 더보기
뉴욕의 맛, 이욱정의 ‘피카레스크’ [리뷰] 뉴욕편 2016년 한 해만 편성이 두 번이나 밀린 우여곡절 끝에 이 2017년 2부작의 형태로 공개됐다. 이례로 10여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음식’이라는 통일된 주제를 통해 스스로를 브랜드화 한 이욱정 PD의 최신작은, 쌓아온 시간 동안 PD 스스로가 ‘콘텐츠’가 된 진면모를 보여준다. 라는 제목만 놓고 볼 때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들을 기대하게 되지만, 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분명 ‘음식’이 가장 중요한 소재이자 주제인 건 사실이지만, 은 음식과 사람, 그리고 그를 담는 공간으로써의 도시라는 큰 흐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피카레스크 소설에 가깝다. 가장 미국적인 크랜베리가 생산되는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주며 깔리는 내레이션이 이를 잘 드러낸다. 크랜베리를 통해 조우한 이민자와 원주민, 이민자와 공.. 더보기
[푸디세이아] 12. 시장과 마지막 만둣국 명절이며 제사 때마다 시장을 간다. 이사를 온지는 채 오년도 되지 않건만, 시장만 따라 나온 것이 10번은 훌쩍 넘긴 것 같다. 많이는 안 산다고 하면서도 과일과 야채, 너무 커서 걱정인 밤, 썰어놓은 가래떡, 식혜, 제사용 과자 등등을 사고 나면 두 손 가득 짐을 들어도 다 못 들 때가 많다. 명절 때만 되면 온가족이 다 뛰쳐나와 고기를 파는 정육점에서 이번엔 찜갈비용 LA갈비를 3kg나 산 대신, 큼지막한 가오리나 먹음직스런 민어는 사지 않았다. 간소하게 본다고는 하지만 오가는 시간만 3시간 가까이 걸리는 길. 시장통에서 갓 튀겨내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어묵과 뻥튀기 등을 사서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나눠먹으며 느릿느릿 집으로 온다. 짐을 다 내리고 냉장고에 넣고 보니, 만두를 덜 가져온 것을 그제서.. 더보기
[금주일기] 금주일기(마지막) 금주일기는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수백만 독자 여러분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 전합니다. 아, 저는 부산입니다. 다섯 시간 걸려 왔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라라랜드'를 봤습니다. '라라랜드'는 끝내 어긋날 저와 당신, 말하자면 수많은 우리들에게 바치는 헌사입니다. 특히 다미엔 차젤레가 재즈를 영화로 형상화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라라랜드'는 재즈영화를 넘어 그 자체로 재즈입니다. 메인 테마가 수많은 변주로 재탄생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집중했습니다.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네요. 이곳은 부산었지. 영화가 끝난 뒤 지나치는 사람들, 그들의 언어를 듣고 나서야 이 사실을 깨달았을 정도니까요. 그건 그렇고 마지막으로서 다시, 모두에게 복된 한 해.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하시길. '라.. 더보기
[푸디세이아] 11. 은하고원과 한단지보 말하자면 삶과 ‘언어’를 새로 배우는 중이다. 얄궂게도 그 언어들은 모두 예전의 내가 알던 것이다. 문법을 등한시한 채 열심히 하지 않았던 타국의 언어는 하면 할수록 빈틈만 보인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은 자부심으로 뭉쳤던 평생의 글쓰기조차 고수의 눈앞에서 고작 2주 만에 철저히 무너진다. 삶이 구멍이 송송 뚫린 해면체와 같다. 다만 게으른 자라도 과업처럼 주어진 일만큼은 어떻게든 해내가는 중이다. 여전히 열심히 한다고 말하기엔 하는 것이 없으므로, 부끄러움만 남을 뿐. 금요일이었나. 한 번 본 영화를 또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잘 가던 귀갓길에서 갑자기 뛰어내렸다. 몸이 지치고 마음은 더 지쳤으므로 쉬는 것이 정석이겠지만, 뭔가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핸드폰으로 부랴부랴 시간표를 확.. 더보기
[금주일기] 나(1.12) 나도 모르게 자꾸 금주일기를 취중일기라고 말한다. 점심에 회사 근처 'Charlee'에 갔다. 파란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그리스 산토리니에 접어드는 느낌이 드는 곳이다.'생맥주' 1잔을 마셨다. 갖가지 피자, 파스타와 함께. "종5역 13번출구로 나와서 뒤돌면 보이는 투썸 끼고 들어오면서 오른쪽 보면 뜬금없이 이자까야가 하나 있음 그것이 야젠" C의 설명에 따라 "뜬금없이" 종로 5가 '야젠'에 갔다. C와 H를 만났다. C는 4년 만, H는 3개월여 만이다. 10분 정도 늦었는데 먼저 만난 둘은 그새 라면, 숙주볶음, 가라아게를 시켜 먹고 있었다. 라면은 국물만 있었고 가라아게는 한두 조각만 남아있었다. 숙주볶음은 깨나 많았다. 가라아게 한 조각과 라면 국물 몇 숟갈, 그리고 숙주볶음을 많이 먹었다. .. 더보기
[금주일기] 술(1.11) 술을 끊을 순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마시되 오늘부턴 2잔을 넘기지 않기로 했다. 얼마 전 술꾼이자 아버지가 비슷한 공약을 내세운 바 있는데 아마 그 영향을 받은 것 같다. R과 흑석에서 만났다. 지난번 여성들과의 술자리에 흠취해 결국 술병에 걸려 귀중한 나와의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던 P형은 이번엔 신경수술을 받았단다. 오늘도 P형은 골방의 것으로 남겨두고 중앙대를 나온 친구에게 저렴한 술집을 추천받았다. 친구는 "저렴은 모르겠다"며 '장독대'를 언급했다. 파전이 대표 메뉴였다. 고맙지만 프로 다이어터로서 밀가루 범벅을 먹을 순 없었고, 대신 R과 단백질 위주의 음식을 찾아 돌아다녔다. 숯불 바베큐 집 등을 전전한 끝에 흑석시장 '순대나라'에 갔다. 모듬 대자와 순대국 하나를 시키고 '장수막걸리' 4통.. 더보기
[금주일기] 요새(1.10) 요새들어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37여년간 그 누구보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사람에 천착했으며, 최소한의 단서―표정, 어투, 눈빛 등―만 확보하는 순간 그를 간파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R이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낙천적이라는 점이다. 깨나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나는 R에게 “사람은 지질하고, 세상은 추악하고, 우주는 지독히 새까맣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낙천일 수 있는 비결이 뭐냐”고 물었는데, 여기에는 물론 약간의―솔직히, 적지 않은―비아냥이 섞이기도 했지만 호기심이나 부러움의 비중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사람을 좋아하지 못하는 병에 걸렸나봐”라는 R의 답에 “야 이 개새끼야”, 아니면 “인간은 원래 그런 거야.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고. 쭈구리들” 따위의 대답을 기대했던 나는 최대한 억울.. 더보기
[금주일기] 지향(1.9) 지향과 지양을 구별못해 시험문제를 하나 틀렸다. 고등학교 3학년 중간고사. 윤리시험이었다. 씩씩대며 교무실에 찾아간 내게 선생은 다만 "책 많이 읽고 생각을 넓게 하라"고 타일렀다. 지금 그 교훈인지 꾸짖음인지 모를 가르침은 공염불이 되고 말았지만 최소한 선생 덕분에 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지양과 지향을 혼동하지 않을 수 있었다. 10여년 만에 불러본다. 이렇게 말하면 내 나이가 드러나겠으나, "그러면 내가 너무 드러나잖아요"라며 굴러온 기회―중고책 따위,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비지떡도 공짜라면 기회라고 생각하는 편이니, 어쨌든―를 걷어찬 홍모 감독의 영화 속 주인공과 달리 나는 드러내보일 만하달 게 그리 없을 뿐더러 차라리 비교하자면 관종에 가까우니까. 오~겡~끼~데~수~까~~? .. 더보기
[금주일기] 가열찬(1.8) 가열찬 주말을 보냈다. 계간(quarterly)비난 멤버들과 노량진 '폼프리츠'에 갔다. '클라우드 생주스' 2잔을 마셨다. 감자튀김 라지 사이즈를 안주로 시켰다. 콜펜인지 바닐라생맥인지를 부여잡고 어찌할 바 모르고 있는 갓대홍을 소르피자는 의기양양하게 바라봤다. 그는 자몽생맥을 들고 있었다. 갓대홍이 나의 몫까지 계산했다. 이로써 우리의 채무 아닌 채무관계는 끝. 예지력 좋은 학곰군이 비 오는 것을 맞췄다. 아니면 그는 단지 예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행이 우산을 살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 추워지겠다. by 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