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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일로 아침부터 한바탕 설전을 벌이고 1시간에 걸쳐 공연을 (비록 좋진 않은 자리지만) 예매를 하고 시험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고 <, 다니엘 블레이크>를 봤더니 기분이 어린왕자 속 보아뱀 - 혹은 모자로 보이는 무엇 - 마냥 유려한 곡선을 따라 오간다. 끝났으니 행복해야겠지만, 영화관을 나서니 역설적으로 이젠 진짜 비빌 언덕이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연말까지 읽겠다고 빌린 책은 가방을 채우다 못해 터질 것만 같은데, 설상가상 영화를 보고 나오니 처량하게 비까지 온다. 뭔가 쏟아질 것 같은 날이다.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벼 형을 만난다. 무한리필 삼겹살집 2곳과 양꼬치집을 갔지만 어딜가나 사람은 바글바글하기에 우리가 머물 ‘자리’가 없다. 사람에 치여 치맥이나 하자고 찾아간 치킨집은 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홀로 침묵 속에 있다. 치킨을 시키고, 맥주 큰 잔 2개를 시킨다. 주전부리 과자를 집어먹으며 홀짝이는 간만에 먹은 맥주가, 달다.

 

큰일이다. 조심해서 마셔야 한다.

 

맥주는 내게 있어서도 술이라고 하기엔 미안한 음료지만, 그 맥주에게조차 미안한 미미한 내 몸둥아리는 채 5%도 안 되는 알코올이 올라오는 냄새를 견디지 못한다. 먼 나라 독일이나 벨기에나 체코나 뭐 그런 나라들까진 바라진 않더라도 맥주가 좀 먹을 만하면 좋겠건만, 치킨집의 맥주는 항상 언제나 한결같이 -- 하다. 그래도 간혹 술이 달게 느껴지는 때는, 역설적이게도 피로가 몰려 쓰려질 것 같은 날, 즉 술을 마시면 안 될 것만 같은 날이다.

 

건 형이 온다. 우리는 으레 그렇듯이 다양한 이야기를 한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2016년의 연말이 가고, 그렇게 거짓말처럼 2017년이 다가온다. 내년에 나는, 아니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지금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다는 건 형의 말을 혼자 곱씹어본다. 1년 뒤의 내 모습은, 그렇게 수 백번을 고쳐 그려왔던 내 미래와 과연 맞닿을 수 있을까.

 

다만 불안을 말하기엔, 아직 우리는 젊고, 나란 아해(兒孩)는 특히 매우 어리므로 그저 달면서 왠지 모르게 알코올향이 올라오는 그것을, 그 노오란 물들을, ‘사민주의의 주스’를 고저 하염없이 들이키는 것 외엔 할 일이 없다. 이 술자리엔 평소에는 올리지 않을 우울과 고민을 얹더라도,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짐의 무게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여전히 비록 모자란 인간은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와 헛소리들을 하느라 홀로 조용히 자괴감에 빠지지만, 그 못남마저도 받아줄 수 있는 사람들 덕분에, 그래도 조금은 안심한다. 그래서 좋다.

 

취하기 좋은 날이었지만 아무래도 ‘주스’만으로는 취할 순 없나보다. 다만 먼 길을 돌아 집에 와 초코우유를 마시고, 다시 또 싸우고, 글을 쓴다.

 

By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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