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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BIFF 2015

인도 ‘바보 형’이 선사하는 감동의 물결, <카쉬미르의 소녀>

*일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주변에서 ‘바보 형’들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너무 착해서 항상 뭔가 손해 보는 그런 형들 말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마지막 영화 <카쉬미르의 소녀>는 그간 잊고 지낸 바보 형들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영화다. 다소 뻔한 감동 스토리임에도 영화를 몰입해서 볼 수 있었던 데에는 주인공 바지란지(살만 칸 분)의 역할이 컸다.

대략적인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파키스탄 초원지대 카쉬미르에서 태어난 소녀 샤히다는 선천적으로 말을 하지 못한다. 안타까운 마음에 샤히다의 어머니는 샤히다가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어 인도의 사원을 찾는다. 파키스탄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샤히다는 잠깐 밖에 나갔다가 어머니와 헤어지고 만다. 그 후에 인도에서 만나는 인물이 바지란지다.

 

주인공의 순수한 내면과 냉정한 세계의 충돌

 

바지란지는 순수함으로 가득 찬 인물이다. 그에게 거짓말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행위다. 그는 꼼수를 지양하고 정도만을 걸으려고 한다. 그런 그에게 파키스탄 소녀 샤히다는 예외적 존재다. 처음 만남에서 말 못하는 귀여운 소녀의 매력에 푹 빠진 바지란지는 결국 샤히다를 집으로 데려온다. 그런데 그가 살고 있는 집은 그의 집이 아닌 정혼자의 집이다. 예비 장인이 샤히다를 탐탁하게 여길 리 없다. 그래도 바지란지와 바지란지의 정혼자는 샤히다를 딸처럼 여긴다. 고기를 먹고 싶은 샤히다를 위해 종교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는 바지란지는 아이를 식당에 데려간다. 바지란지에게 샤히다는 눈에 밟히는 아이다.

 

문제는 샤히다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발생한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프리켓 경기를 본 샤히다가 고향에서 그러하듯 파키스탄을 응원한 것이다. 영화에 잘 드러나듯 인도와 파키스탄은 앙숙의 관계다. 한국의 상황에 빗대면 북한과 일본의 융합체 같은 나라가 인접해 있다고 가정하면 이해가 쉽다. 실제로 인도와 파키스탄은 전쟁을 치른 바 있고, 서로의 종교(인도는 힌두교, 파키스탄은 이슬람교가 주류)도 다르다. 아이러니하게도 샤히다가 태어난 곳은 인도와 파키스탄 경계에 있는 산악지대다.

사실이 드러난 이상(사실 샤히다는 말도 못하는 꼬마일 뿐이지만) 샤히다는 더 이상 바지란지의 집에 머물 수 없다. 그러나 바지런지는 샤히다를 쉽게 보내지 못한다. 아마도 그의 타고난 착한 심성 때문일 것이다. 브로커의 농간에서 샤히다를 구하고 직접 나서 샤히다의 부모를 찾아주기로 마음먹는다. 파키스탄 국경지대로 향한 것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휴전선을 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과정에서도 그는 정도를 고집한다. 겨우 밀입국해서는 파키스탄의 군인들이 통과를 ‘허가’할 때까지 버틴다. 오기에 가까운 그의 몸부림은 그가 얼마나 순수한 인물의 전형인지를 대표적으로 드러낸다.

 

이후에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 역시 바지란지의 순수한 성격과 세계의 충돌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바지란지는 이름도 모르지만 친딸처럼 자신을 따르는 샤히다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조금씩 양보한다. 힌두교도지만 이슬람 사원에 들어가기도 하고, 평생 하지 않을 것 같은 거짓말도 하며, 신분을 숨기기 위해 복면을 두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바보 형은 하나의 목적(샤히다가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한다. 그는 아이를 부모의 품에 데려다주는 것이 자신의 신념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우선순위를 자신이 아닌 타인에 둔 것이다. 현실에서 만나기 어려운 캐릭터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를 보면 볼수록 짠해지는 감정을 느꼈다.

 

감동만큼 돋보였던 코믹스러움과 빼어난 풍경

 

그렇다고 이 영화가 단순히 감동에만 초점을 맞춘 것도 아니다. 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무려 159분이다. 원래 인도에서는 1부와 2부 사이에 인터미션이 있는 전형적인 장편영화다. 그 긴 시간 동안 감동만 있어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코믹을 선택했다. 바지란지가 10번 낙제 끝에 학교를 졸업했다는 식의 에피소드들이나 왠지 모르게 웃긴 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웃음을 만들어낸다. 거기에 카쉬미르의 웅장한 설산과 델리의 야시장 등의 빼어난 볼거리도 영화의 ‘보는 맛’을 선사한다. 게다가 샤히다로 분한 여자아이는 비현실적으로 귀엽기까지 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저런 딸이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마샬라 영화답게 이 영화에도 중간 중간 주인공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그게 과하지 않아서 좋았다. 뜬금없이 춤추고 노래하는 게 아니라 서사의 한 축을 담당했다. 특히 샤히다가 부모님을 그리워할 때 바지란지가 춤추고 노래하면서 그녀를 애써 달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자칫 서글퍼질 수 있는 대목에서 감독은 경쾌한 음악과 춤사위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줬고, 덕분에 관객들 역시 감정의 이완을 통해 적절한 긴장감으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역시 마지막 장면이다. 우여곡절 끝에 인도로 돌아가게 되는 바지란지에게 샤히다가 달려와 품에 안긴다. 말을 할 수 없었던 소녀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그동안 할 수 없었던 말을 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그동안 편하게 지낼 수 없었던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관계가 가까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장면에서 인도 ‘바보 형’이 파키스탄의 ‘귀여운 소녀’를 들어 올리는 순간 영상은 스틸 컷처럼 정지되고 줌 아웃된다. 빼어난 카쉬미르의 경관을 배경으로 두 인물을 바라보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민들이 보인다.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현실에서도 가능할까? 비단 인도와 파키스탄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인도에 여행 다녀온 후배는 이 영화를 인도에서 봤다고 한다. 현지에서는 <바지란지 바이잔>(우리말로는 바지란지 형제)이라는 이름으로 개봉했다고 하는데 그곳에서 꽤나 인기가 좋은 영화였다는 후문이다. 한 가지 인상 깊었던 건 인도 극장에서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춤추는 장면이 나올 때 음악에 맞춰 관객들도 따라 춤추고 박수와 함께 환호한다는 점이다. 확실히 한국과는 다른 영화 시청 문화인 듯하다. 그런데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영화가 끝난 후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 그 전에 봤던 영화들과는 차원이 다른 소리의 세기였다. 영화의 힘은 국적을 가리지 않는 것 같다.

 

by 락

 

*사진 출처: 다음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