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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소수의견>에 대한 두 가지 키워드

‘이 영화는 실화가 아니며, 극중 모든 인물은 허구입니다.’ <소수의견>은 이렇게 어딘지 조급함이 묻어나는 문구로 시작한다. 그리고 저 한 문장 속에는 <소수의견>에 대한 개인적인 아쉬움이 예견되어있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비록 에둘러 언급할 뿐이지만(영화에서는 아예 언급조차 명확히 되지 않지만), 2009년 ‘용산 참사’를 모티브로 삼았다. 이에 따라 영화는 애초에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암묵적으로 2009년의 용산이라는 메시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형편이었다. 즉, <소수의견>은 기본적으로 국가와 개인의 관계, 혹은 국가의 폭력에 의한 개인들의 상처라는 전언보다 늦될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고발영화이자 정치적인 영화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왠지 영화는 ‘정치’라는 구심점으로부터 계속해서 멀어지려하는 것 같았다. 기자회견에서 감독은 이 영화를 ‘법정 드라마’ 혹은 ‘청년 변호사의 성장기’ 쯤으로 규정했다. 영화를 만든 계기에 대해서는 동명의 소설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라 밝혔다. 단지 용산참사라는 사건뿐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의 풍경을 보여주고 싶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런 접근이 낳은 결과는 미흡했다. 물론 영화가 무조건 용산참사만을 전면화해서 다뤄야 했다는 말은 아니다. 문제는 용산참사라는 강력한 구심력을 벗어나기에 영화와 감독의 에너지는 한없이 미약했다는 것이다.

 

1. 조연 박재호(이경영 분)?

 

영화는 이도저도 아니게 되었다. 내러티브가 유려했던 것도 아니었고, 편집이 깔끔했던 것도, 긴장을 쥐락펴락하지도 못했다. 캐스팅도 아쉬웠고, 배경에 깔리는 음악들은 뜬금없거나 영화와 따로 놀았다. 위에서 언급했던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차치하더라도 영화는 별 다른 매력을 내뿜지 못했다.

 

하지만 만약 <소수의견>이 본격적인 정치영화 혹은 고발영화였다면 내 시선은 달랐으리라. 아무래도 그런 영화들은 영화제작의 목적이 다른 장르보다 훨씬 뚜렷하며, 애초에 영화라는 매체에 머무르지 않고 통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 영화들에 대한 나의 시선은 훨씬 유할 수밖에 없다. 영화적으로는 많이 부족하고, 어설플지라도 영화를 넘어서는 어떤 강렬한 에너지를 뿜기 때문이다. <화려한 휴가>(김지훈, 2007), <변호인>(양우석, 2013), 혹은 <카트>(부지영, 2014)가 그랬다.

 

하지만 <소수의견>은 그 어디에도 들지 못했다. 소수의견의 주연은 세 명이다. 감독이 말한 성장하는 ‘청년 변호사’ 진원(윤계상 분), 그와 깊은 친분을 맺는 변호사 대석(유해진 분), 그리고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기자 수경(김옥빈 분). 이 셋은 경찰을 죽여 살인죄로 기소된 박재호의 진실을 알고자, 그리고 알리고자 분투한다. 그런데 정작 박재호는 영화에서 조연에 불과하다.

 

사실 박재호야말로 용산참사의 산증인이다. 비록 영화에 따르면 그마저도 하나의 허구적 존재에 불과하지만, 암묵적으로 영화 초반에 제시되는 사건은 용산참사일 수밖에 없으며 거기서 투쟁하다 자식을 때려죽이던 경찰을 죽인 박재호는 용산참사를 표상한다. 하지만 진원과 대석, 그리고 수경은 말 그대로 허구다. 비유컨대 박재호에게 용산참사는 삶과 죽음의 기록이자, 자식의 무덤이며, 현기증나는 살해 현장이지만, 진원들에게 용산참사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어떤 것이다. 그들에게 용산참사는 그저 박재호들의 표정이며, 진실과 거짓의 난장이며, 성장의 발돋움 판이다. 그러므로 저 셋을 주연으로 내세운 건 영화와 용산참사의 애매한 관계와 정확히 일치한다.

 

박재호의 존재감은 용산 참사 당시에 박제되었다. 진원들이 이끌어가는 참사 이후의 내러티브에서 그는 명멸하듯 존재할 뿐이다. 화염병을 던지고 욕을 내뱉던 박재호는 한없이 어린 양이 되어있다. 그는 정말 용산참사의 상징물, 기표로 전락한다. 영화 내내 박재호는 마치 식당 벽에 걸린, 맛집으로 출연했던 TV프로그램 사진처럼 존재한다. 빛바랜 그 사진이 오로지 과거 TV 출연 경력을 보증하기 위해 존재하듯, 박재호는 영화와 용산참사의 관계를 보증하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그는 그저 편리한 수단이다. 그가 조연으로서 주연 세 인물의 존재감에 묻히듯, 용산참사도 하나의 기호로서 거대한 사건도 다양한 사건에 묻히는 것처럼 보인다.

 

2. 주관적 사건과 객관적 풍경 사이

 

하지만 결코 용산참사는 가볍게 가려지지 않는다. 누가 봐도 이 영화는 용산참사를 다룬 영화임에 틀림없으니까. 말하자면 용산참사는 이 영화의 아주 기본적인 전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화가 그저 한 켠에 걸어두었던 용산참사라는 기호는 의도치 않게 외려 영화 전체를 규정한다. 문제는 이러한 의도와 비(非)의도 사이의 어긋남이다.

 

용산참사라는 거대한 기호를 마련한 뒤에, 영화는 여러 갈등, 사건들을 편리하게 풀어나가려고 한다. ‘사회의 전반적인 풍경’을 그려내고자 했던 감독의 의도가 엿보이는 구석이다. 영화는 나름 다양한 사회적 풍경들을 잡아냈다. 국민참여재판, 언론, 검찰, 청와대, 부성애, 비리, 성장기, 학벌사회 등. 나름 민감한 부분도 있었고, 정곡을 찌르는 장면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제시된 사회의 풍경은 효과적이었나? 그렇진 않은 것 같다. 위에서 말했듯 연출이 아쉬웠던 것은 물론이고, 애초에 용산참사라는 사건은 블랙홀처럼 영화의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풍경이란 관조의 대상이다. 풍경이란 중심을 벗어난 모든 것들이고, 멀찌감치 떨어져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다. 박태원의 <천변풍경> 속 무미건조하기 그지없는 문체가 그렇지 않은가.

 

결국 감독은 전혀 다른 맛을 내는 재료들을 가지고 하나의 요리를 만든 셈이다. 그 맛이야 먹어볼 것도 없다. 용산참사라는 끔찍하고 폭력적 사건과 풍경이라는 객관적 관조는 너무나도 다르다. 만약 이 둘을 세련되게 ‘잘’ 엮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아무래도 <소수의견>에서는 실패한 것 같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도저도 아니게 됐을 따름이다.

 


좋은 작품이길 바랐던 영화를 비판하는 작업이 이다지도 씁쓸함을 다시 한 번 느끼며.


*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