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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차이나타운>에 대한 세 가지 키워드

걸작이 나타났다. 실로 오랜만이다. 물론 ‘최근 한국 영화’ 중에서라는 조건이 붙긴 하지만. 이 말은 곧, 역설적이지만 <차이나타운>의 가능성과 동시에 결정적인 한계를 함축한다. 말하자면 <차이나타운>은 일종의 데자뷰처럼 다가오는 현재 한국 영화의 퇴보하는 경향 와중에 피어난 핏빛 들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그 꽃은 정갈하게 구획된 정원 위에서 피어났다. 비록 잡초라고 할지라도 <차이나타운>의 기반은 현대 영화 시스템이라는 복제된 정원에 있다는 말이다.

결국 <차이나타운>의 가능성은 영화 그 자체에서 찾을 수 있으며, 동시에 결정적인 한계는 영화와 그를 둘러싼 영화 산업 구조와의 상호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차이나타운>은 여러 제약을 어느 정도 수용했지만(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성과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아래 구체적으로 제약은 무엇이었고, 또 그것을 어떤 식으로 극복했는지,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영화를 다뤄보겠다.

 

1. 식사 – 광고(혹은 자본)에 대응하기

 

얼마 전 성황리에 끝난 tvN 드라마 <미생>에 대한 호평 중 하나는 PPL을 활용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영화는 물론이고 드라마도 자본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다. 그 결과, 눈살을 찌푸릴만한 장면들이 종종 등장하곤 한다. 영화 혹은 드라마의 서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누가 봐도 광고만을 위해 끼워 넣은 장면들이 그렇다. 이런 식으로 광고는 갈수록 영화나 드라마 제작에서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지만, 그 존재는 사실상 서사를 방해할 뿐이다.

 

<미생>에서 솔직히 PPL은 적잖이 노골적이었지만, 드라마의 흐름에 방해되지 않는 정도였다. 서사에 부합하는 광고만 선별했기 때문에, PPL은 드라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이런 식의 접근은 PPL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광고 자체를 부정할 순 없다. 그러므로, 문제는 광고라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광고를 어떻게 녹아낼 것인가’가 될 것이다.

 

<차이나타운>도 마찬가지다. <미생>에서 회사라는 공간이 PPL을 결정하는 기준이었다면, <차이나타운>에서 PPL을 결정하는 것은 ‘식사’라는 소재였다. 영화에서 눈에 띄는 광고가 하나 있다. 현재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한 셰프의 식당이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 거기서 석현(박보검 분)을 포함한 직원들은 식당의 이름이 적힌 앞치마를 두르고 있으며, 석현은 일영(김고은 분)에게 식당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적힌 영화 티켓을 보여준다. 그리고 (굳이) 그 티켓은 클로즈업 샷으로 강조된다. 이는 분명 광고임에 틀림없다. 어떤 관객은 극장을 나서며 “식사는 오로지 그 광고를 위한 거였”다고 단정 지었다. 하지만 정말 식사라는 소재는 PPL을 위한 것뿐이었을까?

 

영화에서 ‘식사’하는 장면은 여러 번 나온다. 특히, 일영에게 있어 식사는 의미심장한 의미를 지닌다. 일영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장면에서 혹은 극적인 상황에선 어김없이 그녀의 식사 씬이 나오기 때문이다. 우선, 엄마(김혜수 분)에게 버림받은 어린 일영은 눈물 하나 흘리지 않고 같인 버려진 쏭(이수경 분)을 데리고 엄마에게 돌아간다. 엄마와 재회한 일영의 첫 마디는 대략 다음과 같다. 짜장면은 곱빼기로 시켜 달라. 배고프니까. 철없어야 마땅할 어린 시절부터 일영은 강인했고, 잡초처럼 강한 생명력을 지녔다. 이러한 일영의 특성은 아무 일 없었다는 말투로 내뱉는 ‘짜장면 곱빼기’라는 표현으로 집약된다.

 

석현과의 알쏭달쏭한 관계에서도 식사는 중요한 소재다. 애초에 둘이 처음 만나는 씬에서 석현은 일영에게 파스타를 만들어준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라며. 여기서 파스타라는 소재는 그리 중요하진 않다. 정말로 파스타는 이후 식당 광고를 위한 포석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무엇이 됐든’ 일영을 처음 만난 석현이 그녀에게 음식을 대접했으며, 그 전까지의 시크한 모습과는 달리 일영이 어쨌든 한 술이라도 음식을 먹는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드러나듯 일영에게 음식은 처절한 고통 혹은 트라우마를 보상받는 중요한 위안이다. 그녀에게 석현은 무엇이었든지 간에(이는 세 번째 꼭지에서 다룰 것이다.) 어쨌든 음식에 대한 일차적인 갈망(배고픔) 일에 대한 강박이나 타인에 대한 불신에 앞선다.

 

마지막으로, 죽을 위기에서 모면한 뒤 처음으로 찾아가는 곳은 우씨(정석용 분)가 분식을 팔고 있는 트럭이다. 거기서 일영은 오뎅을 먹는다. 여기서 오뎅은 기본적으로 위에서 말한 ‘짜장면 곱빼기’와 유사한 소재이지만, 문맥상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트럭을 떠나면서 일영은 우씨에게 작별 인사를 고한다. “오뎅 맛있었어요.” 짜장면이 일영의 강인함과 생명력을 드러냈다면, 오뎅은 반대로 일영이 연이어 맞서게 될 죽음에 대한 불안을 내포한다.

 

이런 식으로 영화에서 식사와 음식은 일영의 정체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기호다. 그 와중에 파스타가 소재로 쓰인 것은 위에서 지적했듯, 오로지 광고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접근할 때, 광고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차이나타운>에서의 파스타, 그리고 식당 광고는 나름 ‘식사’라는 코드 속에 잘 녹아들어갔다. 무작정 광고를 받아들인 뒤, 영화를 거기에 짜 맞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불가피한 제약 속에서 선택한 최선의 대응이었다고 할만하다.

 

2. 식구와 엄마 – 가족을 비껴가기

 

최근 한국영화에서 가족이란 코드가 유행하고 있다. <차이나타운>에서도 일종의 가족이라는 형태가 존재하지만, 그 존재방식은 기묘하다. 사실 그걸 가족이라 부르기도 애매하다. 영화에서는 가족이 아니라 ‘식구’라는 표현을 쓴다. 식구를 한자로 쓰면 식구(食口)이며, 사전적 의미는 ‘한 집에 같이 살며 끼니를 함께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다시 식사라는 소재가 중요해진다. 앞서 식사는 일영의 정체성을 드러나는 기호였지만, 그뿐만 아니라 식사는 일영을 포함하여 엄마, 우곤(엄태구 분), 쏭, 홍주(조현철 분) 모두를 하나로 묶는 유일한 매개물이다. 식사를 통해 다섯은 한 자리에 모이고, 회전 테이블에 올라간 중식을 나눠 먹는 그들이 바로 ‘식구’다. 어쩌면 식구로서 그들 모두는 외양은 다를지라도 일영의 분신들이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각자 사정에 의해 더럽고 잔혹한 곳에 모였지만, 본질적으로는 일영의 처지와 같은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식사’로서 매개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일영이 탁(조복래 분)에게 맞아 쓰러진 뒤 기묘한 두 씬이 이어진다. 그 중 첫 씬은 기절한 일영의 환상일 수도 있고, 기억일 수도 있다. 어쨌든 거기서 카메라는 고정된 채 식사를 하는 다섯 식구를 담는다. 앞선 씬이나 이후 전개되는 씬들과 비교했을 때, 이상하리만치 화기애애하고 가볍다. 문맥상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그 씬의 의미는 직전 시퀀스와의 비교를 통해서만 명확히 드러날 수 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구체적인 얘기는 삼가겠지만, 어쨌든 여전히 그들 식구을 하나로 묶는 것은 식사라는 점이 중요하다.

 

결국 엄마와, 피 하나 섞이지 않은 이들은 가족은 아니지만 식구임에 틀림없다. 가족이라기에 그들은 매정하며, 계속 강조되듯 서로 ‘필요 없어지면 죽이’기까지 한다. 결코 <차이나타운>이 가족영화로 분류될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그 와중에 식구로서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대감이 눈에 띤다. 우곤, 일영, 쏭, 홍주 사이의 애증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엄마와 특히 일영 사이의 기묘한 애착이 그렇다.

 

어쩌면 엄마와 일영의 관계는 피가 섞이지 않은 것,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무뚝뚝하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보통의 모녀관계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같지도 않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의 후반부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딸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엄마가 된다. 이런 순환을 영화는 <차이나타운>만의 방식으로 비뚤게 반복한다.

 

3. 빠지고 치기 – 로맨스와 젠더를 다루는 방법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일영이 엄마의 손아귀에서 점점 벗어나다 마침내 등을 돌리게 되는 데까지가 전반부고, 이후 엄마를 벗어난 일영이 다시 엄마로 돌아간 뒤 벌어지는 사건이 후반부다. 둘 사이에는 페이드 아웃, 페이드 인으로 연결된다. 영화에서 쇼트를 이렇게 나뉜 부분은 단 두 번 등장한다. 즉, 감독이 의도적으로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고 볼 수 있다.

 

전반부에서 압도적으로 중요한 관계는 물론 일영과 석현의 관계다. 둘은 애초에 채무관계로 만났지만, 이상하게 영화는 둘의 로맨스를 강조한다. 여기서 나는 좀 불쾌해졌다. 일단, 로맨스가 너무 뜬금없었다. 역시 한국 영화의 트렌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결정적으로, 나의 불쾌함은 거기서 얼핏 묻어나는 젠더에 대한 감독의 시각 때문이었다.

 

영화 초반 일영의 짧은 머리, 낮은 음색, 옷차림, 행동에서 여성성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그런 일영이 석현을 만난 뒤로 점차 바뀌기 시작한다. 말투라든지, 눈빛, 분위기 등. 결정적으로 쏭과의 쇼핑 씬에서 그녀는 이전이라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꽃무늬 원피스를 사 입는다. 거기서 일영의 시점 쇼트는 그야말로 원피스를 탐닉한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여성성이란 찾아볼 수도 없던 여성이 남성을 만나 비로소 자신도 몰랐던 여성성을 ‘발견’한다는 전형적인 구조를 취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에서─엄밀히 말하면, 전반부 마지막의 결정적인 사건 이후로─상황은 이상하리만치 급변한다. 거기서 일영과 석현의 관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발견이 아니라 사실은 ‘발명’되었을 뿐인 일영의 여성성도 마찬가지다. 여성성의 상징으로서 원피스는 더 이상 여성성을 나타내지 못한고 걸리적거릴 뿐이다. 그마저도 일영은 원피스 대신 투박한 바지를 다시 입는다. 말투, 분위기 눈빛도 제자리로 돌아온다.

 

후반부에서 핵심적인 관계는 일영과 엄마의 관계다. 전반부에서 남녀의 로맨스를 중심으로 관계가 형성되고 전개되었다면, 후반부에선 여자들 간의 관계로 바뀌어 로맨스는 오묘하게 뒤틀린다. 로맨스를 대신하는 것은 여자들 사이의 연대, 연민이자 증오와 저주다. 젠더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전치는 꽤 전복적이다.

 

나는 이러한 구조를 ‘빠지고 치기’라고 부르고 싶다. 영화 용어 중에 ‘치고 빠지기’란 것이 있다. 저항적이고 전복적인 메시지, 혹은 이데올로기로 ‘치고’ 들어간 뒤, 마무리는 대중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뉘앙스로 ‘빠지는’ 구조를 의미한다. 대표적인 영화로 <솔드 아웃>(브라이언 레반트, 1996)이 있다. <차이나타운>은 이와 정반대의 구조다. 로맨스, 혹은 젠더적 지배이데올로기로 ‘빠진’ 뒤, 그를 전복시며 ‘치고’ 들어간다. 둘 다 동일한 제약 위에서 고안한 나름의 생존 전략일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를 따지자면, <차이나타운>의 ‘빠지고 치기’의 전략이 훨씬 효과적이다.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