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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사회

청춘을 세대로 규정하는 나라

오포세대, 달관세대, 청년실신시대, 절망세대 등 청춘을 옥죄는 단어들이 물밀 듯이 생겨났다. 이런 단어들을 접할 때면 원인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누군가 청춘은 설레는 봄과 같다고 했는데 이제는 통하지 않는 말인가 보다. 청년위기론엔 보수, 진보가 없다. 언론은 너나 할 것 없이 도서관을 지키는 청년들을 조명하고, 청년실업을 걱정하며, 이대로는 국가에 미래가 없다고까지 경고한다. 다 맞는 얘기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너무 지나친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10년, 20년 전 청춘들도 힘들고 고민 있기는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말이다.

가장 먼저 불편하고 찝찝한 느낌을 준 기사는 조선일보의 <‘달관세대’가 사는 법> 시리즈였다. 기사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달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아니 어쩌면 정말로 달관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사에 나온 개인이 달관을 하든 하지 않든 그건 내 관심 밖이다. 다만 해당 사례를 놓고 세대론으로 묶어버리는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한 취업준비생이 지적하듯, 조선일보는 ‘선택의 여지 없이 비정규직을 전전하고, 타의에 의해 씀씀이를 줄일 수밖에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깊이 들어봐야 했다’(<조선일보의 '달관세대', 원인과 결과 뒤바뀌었다>, 오마이뉴스 기사 참고)

다른 언론의 시선도 불편한 건 마찬가지였다. 조선일보의 기사가 논란이 되자 곧이어 경향신문이 <‘달관세대’가 아니라 ‘절망세대’다>라는 제하의 기사를 냈다. 달관과 절망은 엄밀히 다른 개념이라는 지적과 청년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 문제라는 분석은 그럴듯했다. 그런데 경향신문은 조선일보를 비판하면서 똑같은 우를 범하고 말았다. 기사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청년을 ‘절망세대’로 옭아맨 것이다.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여러 가지 통계를 들어 청년문제를 깊게 파고들었다는 것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해결책이 공허하기 그지없다. 구조적 문제가 있으니 구조적 차원에서 해결하자는 식의 논리다.

 

두 기사에서 가장 불편하게 느껴졌던 것은 일반화였다. 왜 청춘을 하나로 규정하려 드는가. 각자의 자리에서 꿈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이들도 있고, 달관하는 이들도 있으며, 체념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에게 응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힘 빠지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을까. 달관하든 절망하든 그건 제각각 청춘들이 고민 끝에 내리는 문제다. 냉정히 말해 다른 세대가 멋대로 규정하고 재단할 일이 아닌 것이다. 이 말은 비단 청춘세대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중년과 노년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저마다의 삶을 하나로 묶는 일은 분명 필요한 작업이지만 섣부른 세대론은 위험하다. 세대론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새 많이 힘들지?”

 

가족, 친구, 선배들이 가끔 이렇게 물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사실 민망함을 감추기 어렵다. 신문이나 뉴스 속에 나오는 아침 9시부터 자정까지 공부하는 청춘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아서다. 그런 청춘도 있지만 나처럼 늦게 일어나 책 읽고, 블로그에 글 쓰고, 이것저것 배우는 청춘도 있다(다음 주엔 축구심판 자격증에 도전한다. 단순히 축구를 좋아하는 이유 때문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게으르게 사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치열하게 살지도 않는 그런 청춘들도 있다는 것이다. 힘들지 않은데 힘듦을 강요하는 듯한 질문을 받으면 과분함을 느낀다. 어떤 답을 해야 할지도 고민이다. 절망할 정도로 힘든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처처럼 모든 걸 달관한 것도 아닌데….

 

한편으로는 취업이 아닌 자신만의 길을 가고자 하는 이들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 가수, 만화가, 작가 등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용기 있는 예술가들이다. 그들은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최소한의 생활비를 마련하고 본인이 하고 싶은 것들을 한다. 그런 그들에게 달관세대, 절망세대라는 딱지는 감히 어울리지 않는다. 좋아하는 일에 몰입해 있는 그들은 절망도, 달관도 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기만의 길을 걸으며 기쁨을 찾을 뿐이다.

 

청춘의 삶은 결코 획일적이지 않다. 같은 취업준비생이더라도 여건과 욕구는 저마다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달관세대’, ‘오포세대’, ‘절망세대’ 등 청춘 앞을 수식하는 모든 단어들을 거부한다. 말이란 하면 할수록 말하는 대로 이뤄진다고 한다. 아무리 미래가 어렵다고 청춘들을 달관과 절망이란 감정 프레임 속에 가둬둘 필요가 있을까. 여전히 청춘은 봄이다. 화분 속의 꽃이든, 억척스러운 야생화든 꽃은 피기 마련이다.

 

*사진 출처: Tv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