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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제주도에 다녀왔다. 편도 만 원이라는 획기적인 가격의 티켓이 생겨서 충동적으로 결제를 해버렸다. 물론 서울에서의 일정 탓에 하루 만에 돌아와야 했던 꿈같은 시간이었지만. 2월의 제주도는 서울보다 한껏 온화했다. 바닷바람은 거셌지만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였다. 널리 펼쳐진 바다를 보고 있자니 그동안 관계에서, 일에서 치였던 스트레스가 한순간에 떠나는 기분이었다.

드라마 리뷰나 할 것이지 왜 이런 자랑을 하나 싶으신가. 그래서 준비했다. 제주도를 갈 수 없지만 그 곳에 대한 아련함만큼은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좋은 단막극을 소개하려 한다. 제목부터 대놓고 제주도다. 엄태웅, 민지아 주연의 2004년작 단막극 <제주도 푸른 밤>이다.

 

투박한 화면 구성을 갖고 있는 10년도 더 된 단막극을 소개하는 이유는 지금 봐도 절절한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아주 단순하다. 함께 한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는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 드라마 소개에 적혀 있는 내용이다.

 

첫 장면은 제주도 바다 위에 쓰러져 있는 기태(엄태웅 분)와 그를 바라보며 노래 ‘제주도 푸른 밤’의 한 소절을 부르는 희숙(김민주 분)으로 시작된다. 아름다운 제주도 바다 전경과 의미를 알 수 없게 배치된 두 남녀의 모습이 어우러져 있다.

 

이야기는 과거로 돌아간다. 여기서 잠시, 이 단막극의 연출은 <괜찮아, 사랑이야>, <그 겨울, 바람이 분다>, <그들이 사는 세상> 등 명품 드라마라 불리는 것들의 제작을 맡은 김규태다. 그의 이력을 짚고 넘어가는 이유는 <제주도 푸른 밤>의 영상이 획기적으로 촬영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를 회상하는 모든 장면은 흑백으로 표현되었다. 조연출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드라마의 설정 상 과거를 흑백화면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고, 세련된 화면을 얻기 위해 일부러 칼라로 찍은 후에 색을 재보정해서 흑백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알 수 있었다.

 

과거를 흑백화면으로 표현했어야 하는 드라마의 설정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한 공간에 있으면서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추억이다. 극적으로 그 설정을 표현하는 장치가 세련된 흑백화면이라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다. 지금도 화면 연출의 대가로 불리는 김규태PD는 이 때부터 뛰어난 감각이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다시 드라마의 내용으로 돌아와서, 주인공 기태는 한 때 잘나가던 제주도 여행 가이드였다. 그에겐 한 여자, 희숙이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헤어졌다. 시간이 흘러 기태는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이것이 두 사람의 추억 여행의 시작이다.

 

그동안 희숙에게 못해준 기억만 떠올라 너무나도 미안했던 기태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기 위해 희숙이 있는 곳을 찾아간다. 그러면서 기태는 과거를 계속 떠올리는데, 그 때마다 정말 너무할 정도로 희숙에게 잘 해준 적이 없다. 그리고 다시 찾은 희숙은 잘 산다는 소문과 달리, 자신이 힘들게 했던 것보다 더 못살게 하는 폭력적인 남자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는 기태는 다시 희숙을 떠나지만, 희숙은 기태와의 기억을 전부 좋은 것으로만 간직하고 있다. 기태는 그것을 알지 못하지만 희숙은 확실히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두 사람은 엇갈리고 만다.

 

드라마는 이후에 반전을 주지 않는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기태는 결국 죽고 만다. 기태의 장례식에 간 희숙은 하염없이 울고 만다. 그리고 기태가 남긴 유품을 받는데 그것은 제주 행 비행기 표다. 영영 어긋날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이야기다.

 

내용만 들어보면 단순한 슬픈 이야기를 특별한 명품으로 만든 힘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앞에서 언급한 섬세한 연출과 더불어 그 해 단막극 연기대상을 함께 거머쥔 엄태웅과 김민주의 연기에 있었다.

 

두 사람의 대사가 많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짧지만 많은 의미를 품고 한 마디씩 던지는 그들의 깊은 내면 연기의 힘이 엄청났다. 그 힘 덕에 2012년 단막극 페스티벌에 이 드라마가 다시 스크린을 통해 상영되었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따금씩 최고의 단막극으로 회자되고 있다.

 

단순한 사랑 이야기지만 탄탄한 극본과 대사, 그리고 연기와 연출이 어우러진 <제주도 푸른 밤>. 제주도에 대한 애정과 더불어 더 애정하고 싶은 그런 좋은 단막극이었다.

 

사진 출처 : KBS,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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