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

[3인의 현상범들] #8 민감하다 [소르피자.txt] E주임은 점심을 먹은 뒤 사무실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그는 갑자기 보도블록에 걸려 넘어졌다. 까끌한 면에 손이 쓸려 생채기가 났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덤덤히 손을 털고 일어났다. 보도블록에 떨어져 있는 벚꽃잎들. 그는 자신이 걸려 넘어진 것이 벚꽃을 보느라 한 눈을 팔아 생긴 일이라 생각해 괜스레 벚꽃나무를 발로 한 번 걷어찼다.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경기가 좋지 않았다. 사기업에 다니는 자신의 친구들은 작년에 성과급을 받지 못했다고 투덜댔고, 얼마 전 있었던 설날에도 상여금이 작년보다 곱절은 더 줄었다며 그에게 하소연했다. 하지만 E주임은 그런 말을 들어도 와 닿는 것이 없었다. 자신처럼 나라의 녹봉을 받아먹는 공무원쟁이들은, 늘 일정한 봉급을 받고 하던 일만 하면 됐기에 성과급.. 더보기
[3인의 현상범들] #5 실패작 [소르피자.txt] 이것은 에어컨이다. 이것은 히터다. 이것은 둘 다 될 수가 있다. 지름이 30센티도 안되어 보여 약할 것 같지만, 이 작은 기계 하나만 건물에 있어도 모든 층에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과, 겨울에는 따뜻한 바람을 제공해줄 수 있다. 누군가는 이것을 보고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사우론’이라 말할 지도 모르겠지만, 이는 기술혁신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나 하는 말이다. 그런 자가 있다면 더운 여름날 옥상에서 ‘사우론’을 닮은 메론 맛 눈깔사탕을 빨아먹으며 그 사탕이 입에서 녹을 때까지 엎드려뻗쳐를 하고 그것이 끝나자마자 호빗처럼 맨발로 63층 건물을 계단으로만 내려와야 할 것이다. 밑 부분은 왜 녹색으로 칠해져 있냐고? 아 그건, 여름이 너무 더워서 옥상에 있던 우레탄이 녹아 .. 더보기
[3인의 현상범들] #4 이름 없는 화가 [호래.txt] 술을 마셔서 정신이 조금 멍한 상태로 나는 지금 눈앞에 있는 그림을 보고 있다. 그림에는 검은 선이 몇 개 있는데 도대체 무엇을 그린 건지 모르겠다. 섬 같기도 하고 산 같기도 하고. 바다 같기도 하고 육지 같기도 하다. 화장실을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나는 그 그림 앞에 멈춰 섰다. 굉장히 관심 있는 사람처럼 그림을 보고 있지만 사실 그림엔 별로 관심이 없다. 무엇을 그린 지도 알 수 없는 그림 따위 봐서 무얼 하나. 그냥 술자리엔 바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데 분위기 맞추며 앉아 있는 건 고역이다. 개새끼들 그냥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술을 마시면 나는 조금 더 감정에 솔직해 진다. 아니다. 지금 이 감정은 어딘가 과장된 면이 있다. 사실 걔네들은 나한테 .. 더보기
[3인의 현상범들] #3 말하자면 말입니다 [학곰군.txt]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아버지였다. 나는 짐짓 슬픈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잘 되고 있니? 네? 그냥 그렇죠. 일부러 고개를 떨구었다. 아버지의 그림자가 보인다. 검은색. 아니 그보다는 흐린, 너무 많은 붓이 오고가서 이제는 수심을 알 수 없는 물통의 색 같은 그의 얼굴이 있었다. 너의 쓰임이 있을 곳이 있을 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머리가 아버지의 그림자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영영 나오지 못할 것처럼 그대로 멈춰버렸다. 벗어날 수 있을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세상에 쓰임이 있는 곳이 있을까. 아버지도 한 때는 가슴에 광활한 대지를 품고 무작정 앞으로만 달려가던 때가 있었다고 말한다. 네 나이 때는 하늘을 품어도 모자라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러나 잘 될 것이라는 말을 하며.. 더보기
[3인의 현상범들] #2 아버지를 위하여 [소르피자.txt] “이제 선택해야 할 시간이야.”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얀색의 폰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수백 수천 게임을 치러왔다. 많은 선택들이 그의 머리를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시작한 지 세 번째 순서 만에 E7칸에서 나이트에게 잡혔던 기억, 자신을 희생하면서 상대방의 흑색 퀸이 잡혔던 일, 상대편 진영에 끝가지 가서 백색 퀸으로 승급한 자신의 동료를 본 기억도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게임을 치러오면서 그는 지쳐버렸던 것이다. 게임을 이겨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기사를 위해, 주교를 위해, 여왕에게 길을 터주고 왕을 지키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승급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 순서는 그에게까지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늘 게임에서 그는 드디어 상대방 진영에 도달한 것이었다. “어떤 것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