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 너머 리스본에는 [서평] 리스본행 야간열차 빼어난 기억력과 그리스와 라틴, 헤브라이어에 대한 지식으로 문두스(Mundus, 세계)란 애칭으로 불리는 고전학자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 일평생을 큰 일탈 없이 살아온 그는 어느 날 우연히 포르투갈 여인을 만나게 된 이후 마법에 홀린 듯 리스본으로 떠난다. 말 그대로 불현듯 그 자신의 전부와도 같은 세계를 무너뜨리듯 떠난 그의 여정은 이후 거짓말과도 같은 마법처럼 펼쳐진다. 는 그레고리우스의 시선에서 그가 고서점에서 얻게 된 의 저자이자 포르투갈인인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여정 두 가지의 큰 흐름으로 진행된다.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의 삶을 찾아 아무 연고도 없는 낯선 도시 리스본. 언어조차 잘 통하지 않는 그 곳에서 그레고리우스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 각자의 시선과 기.. 더보기
‘억만무려의 모욕’ 속에서도 [서평] 김수영을 위하여 쓰기에 앞에 고백하자면, 강신주 책의 서평을 쓰는 이는 정작 강신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좋아‘했었’지만 이제는 좋아하지 않는다. 과 에 삶의 많은 빚을 졌을 때에도 그의 알 수 없는 폭력성은 껄끄러웠다. 내게 있어 그는 마치 모두를 단죄하려는 세례 요한을 꿈꾸지만, 정작 기준에 따라 스스로마저 단죄해야 함에도 스스로에게는 절대로 칼을 댈 수 없는 뻔뻔한 옛 애인과도 같은 존재다. 그럼에도 오늘의 글 역시 그에게 빚을 져야 한다. 모든 게 끝이 나도 지워낼 수 없는 것이 애증이듯, 그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강신주라는 거울을 통해 비춰진 “김수영을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는 제목 그대로 시인 김수영을 위해 쓴 글이자, 동시에 작가 자신이 작가 자신에게 삶에 .. 더보기
"언제 밥 한 번 하자"는 거짓말은 어떻게 삶을 연장하겠다는 의지가 됐을까 - 시인의 일상어사전, 권혁웅, 마음산책 말에는 ‘멋’이 있다. 각 말 자체가 갖고 있는 다양한 뜻, 말과 말의 조합해 만들어내는 새 뜻, 말을 해체해 발견하는 숨은 뜻까지. 말에는 멋이 있다. 그래서 말은 외롭지 않다. 권혁웅 시인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맞벌이한 부모님 덕에 ‘외로울 권리’를 깨치고 닥치는 대로 텍스트를 읽었다고 전했다. 또한 오랫동안 ‘교회 오빠’로 살면서 성경을 공부하다 신화에 빠지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렇게 이야기와 언어를 탐닉한 덕일까. 그는 시인이 되어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서문에서 책 을 일상어들의 속내를 다룬 것이라고 썼다. 문학에서는 ‘죽은 말’ 취급을 받는 ‘일상어’야말로 삶의 현재형이자 표현형이지 않을까, 상투어와 신조어, 유행어, 은어들의 무의식에 삶의.. 더보기
귀엽고 사랑스런 벤야민 [서평] 모스크바 일기 사랑할 수밖에 없는 벤야민! 자못 심각하고 무거운 얼굴들로 알 수 없는 이야기만 설교하듯 건넬 것만 같은 무수한 사상가들의 책들 가운데서, 는 그 이면에 숨겨진 우리와 같이 웃고 울고 숨 쉬는, 다소 찌질한 듯 귀여운 인간의 생생한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책이다. 발터 벤야민의 ‘일기’는 그가 사랑했던 여인 아샤 리시스를 좇아 모스크바에서 보냈던 날들에 대한 기록이다. (책에서 드러나진 않지만) 그녀는 신경쇠약증으로 인해 모스크바에서 요양 중이고, 그렇기에 벤야민은 그의 옆을 지키는 파트너 베른하르트 라이히와 함께 그를 만나러 가는 일이 많다. 동시에 수많은 주석들이 말해주듯 벤야민의 일상은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과의 교류로 이어진다. 그는 그곳에서 박물관을 탐방하고 도시 구석.. 더보기
어둠의 성장소설 : 악마, 어른이 되다 [서평] 정유정, 종의 기원 작가 정유정의 글은 석유를 다 시추한 사막의 검은 모래 같다. 끈끈하고 기분 나쁜 냄새가 풍긴다. 회색 혹은 검은색에 가까운 알싸한 피비린내가 섞인 시큼한 악취.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도 모든 것을 삼켜버린 듯한 기분 나쁜 침묵. 이 호수에서 풍겨 나오는 쿰쿰한 물비린내가, 에선 모든 것이 타버린 듯한 잿내가 물씬 풍겨 나왔다면 이번 에서는 인위적인 어색함이 가득한 락스 냄새가 난다. 정유정의 소설은 사실 좋은 작가의 작품이라기 보단 독특한 장르문학의 개척자 정도의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엄청나게 매력적인 문장으로 구성된 것도 아니다. 위대한 통찰력을 보여준 적도 없으며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통쾌한 스토리를 안겨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같이 읽고 난 사람의 기분을 찜찜하고 .. 더보기
시대가 만든 '언론 투사', 청암을 기억하며 <송건호 평전> “나는 천성적으로 투사가 될 수도 없고 운동가도 될 수 없습니다. 나는 가만히 놔두었으면 평범한 신문기자로 늙어 죽을 사람입니다. 이 경우 없는 시대가, 이 더러운 세상이 나를 가만히 놔두질 않고 재야운동가로 만들었습니다. 나는 본의 아니게 투사라면 투사가 되었습니다” 청암(靑巖) 송건호. 해방 이후 시대의 온갖 풍파에 맞섰던 그를 후배들은 ‘20세기 최고의 언론인’이라고 불렀다. 사실 그는 헌책방을 순례하며 책을 읽는 소박한 취미를 갖고 있던 평범한 기자였다. 그저 언론의 자유로움과 상식을 지키려 했을 뿐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는 ‘투사’가 되어 있었다. 책 은 몰상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상식을 지키며 살아간 지식인, 청암 송건호의 삶을 그리고 있다. 책은 분명 한 인물을 주로 서술하고 있지만 읽다보면 .. 더보기
SF의 품격 [서평]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이과생에 대해 한국-문과형 사람들이 대개 가진 편견 중 하나는, 그들이 전문성은 갖추고 있지만 그걸 풀어내는 능력은 없다는 것. 이과 대 문과 프레임으로 짜인 많은 이야기 속에서 대개 이과들은 똑똑하기는 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알 수가 없는 이들로 그려지곤 한다. 글에 있어서도 그러한 편견은 반복된다. 글 잘 쓰는 똑똑한 이과생에 대한 로망은 있지만, 그건 심하게 과장해서 말하자면 “무한동력”에 대한 꿈과 같은 것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항상 언제나 그렇듯이, 세상에 똑똑한 사람은 많은 법이다. 나만 빼고. 프리랜서 겸 작가 테드 창의 중, 단편선집 는 SF 소설계에 있어 역작으로 평가받는 작가의 작품집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중국계이자 이공계 출신인 그는, 그.. 더보기
가끔 세상은 소설보다도 못하여 [서평] 왕과 서커스 시리즈로 유명한 일본 작가 요네자와 호노부의 ‘베루프 시리즈’ 중 하나인 . 전작 에 등장한, 작중 시점에선 갓 프리랜서 행보를 시작하려는 기자 다치아라이 마치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일종의 추리소설이다. 작중 배경은 황태자에 의해 당시 국왕이었던 비넨드라 왕과 왕비를 포함한 왕가 일가족 8명이 사망한 2001년의 네팔. 크게 강렬하지 않은 반전, 전형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평면적인 캐릭터들, 약간 미완성 된 듯한 감정선과 플롯 등 그의 전작들보다 크게 좋다고 할 수 없는 다소 평범한 추리소설이지만, 책은 오히려 조금은 낯선 포인트에서 다른 의미를 통해 의의를 갖는다. 이는,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프리랜서 ‘기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기에 가능한 부분이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다치아라이.. 더보기
복지의 답은 신뢰다 [서펑] 코펜하겐에서 일주일을 "북유럽 여행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집었다면 고이 놓아주시길”이라는 말로 서문을 여는 은 저자 유승호 교수의 덴마크 방문기이자, 동시에 북유럽 국가의 복지와 사회시스템에 대한 성찰을 담은 책이다. 책은 코펜하겐으로 여행을 떠난 저자가 직접 부딪히며 봤던 코펜하겐의 모습을 토대로, 북유럽 사회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담아낸 것이다. 묘사된 코펜하겐의 모습은 확실히 한국과는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다. 600만도 안 되는 적은 인구의 특성답게 처음 만난 기차 안에서도 이력서를 주고받을 수 있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커뮤니티형인 사회. 내부 결속은 긴밀하지만 폐쇄적인 이민 정책이 보여주듯 외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배타적이다. 국민소득 6만 달러에 육박하는 소.. 더보기
<청년, 난민 되다> 우리의 ‘보금자리’는 어디에 지금은 어엿한 아파트의 주인인 나의 부모님은 단칸방에서 살림을 시작하셨다. 서른 해에 가까운 삶을 꾸려오면서 이들은 개미처럼 일하고, 2년마다 짐 싸기를 반복하면서 집을 조금씩 늘려왔다. 노력의 보상이라도 받듯, 자녀들이 대학에 들어갈 즈음에 그들은 자가 아파트를 구입했다. (물론 여전히 갚아야 할 대출은 남아 있을 것이다) 부모님의 성공을 보고 자라온 나는 그들이 살림을 차렸을 나이에 나도 단칸방에서 삶을 시작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말 그대로 녹록치 않았다. 졸업을 앞둔 무직, 청년 취업준비생인 나는 평균 월세가 평당 15만원 되는 고시원에서 살 돈조차 없다. 다행히 금수저도, 흙수저도 아닌 쇠수저 쯤 되는 서울 거주 부모님 덕분에 집에 대한 고민은 취업 전까지 접어둘 수 있었다. 는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