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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지극히 주관적인

지극히 주관적인 2월 개봉 영화 기대작 네 편

벌써 2월이다. 1월 개봉작을 추천한 지(‘지극히 주관적인 1월의 기대작 세 편’) 벌써 한 달이 지났다니. 다들 1월 한 달 동안 영화 많이들 보셨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래도 위에 소개한 세 편의 영화 중 두 편의 영화를 보았다.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다.

2월에도 어김없이 다양한 영화들이 개봉한다. 역시나 관심이 가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별다른 흥미를 유발하지 못하는 작품도 있다. 이번 달에는 꽤 많은 기대작이 있었다. 그중에서 네 작품을 (어렵사리) 선별했다. 아래 각 작품에 대한 기대 평을 적어보았다. 1월에도 그랬듯, 지극히 주관적으로.

 

<쎄시봉> (2월 5일 개봉) - 다만 내가 걱정하는 건

 

아무래도 <쎄시봉>에 대한 얘기를 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다. 근래 들어 세차게 불고 있는 ‘복고’ 열풍. ‘복고’라는 현상이야 언제 어디서나 나타나는 것이고, 패션 자체가 돌고 도는 것이라면 근래의 ‘복고’ 열풍은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복고가 ‘밀집’되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은 현재 상황은 좀 특별하게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영화계에서만 해도 올해 들어 <국제시장>(윤제균, 2015), <허삼관>(하정우, 2015), <강남 1970>(유하, 2015)에 이어 이번 <쎄시봉>까지 벌써 네 작품이나 ‘복고’를 컨셉으로 만들어졌다. 거기다 최근에 <무한도전>에서 특집으로 방영한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토토가)’ 이후 지나다니는 거리마다 90년대 음악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렇게 복고 열풍이 강렬하게 부는 까닭에 대해서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단순히 과거에 대한 향수가 우연히 겹쳐서 나타났거나, 혹은 도미노처럼 연쇄반응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

 

또는 현재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미래에 대한 비관이 주요 원인일 수도 있다. 과거보다 우리는 분명 크나큰 ‘양’적 성장을 이루어 냈지만, 어쨌든 현재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그러한 지표는 그다지 위안이 되지 못한다. 지금 이대로라면 앞으로 점점 더 늘어갈 대다수 서민의 삶은 힘들면 더 힘들어질 것만 같다. 이렇게 현재에 질식하고, 암울하기 짝이 없는 미래를 마주한 우리의 해방구는, 그렇다면 오직 과거밖에 없으리라.

 

과거는 늘 미화된다. 과거의 고난이나 고통은 현재의 것도 아니고, 앞으로 우리가 겪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것. 마치 집안 어딘가 처박아 둔 값싼 골동품 같은 것. 늘 나에게서 떨어져 있지만, 언제든지 들여다볼 수 있는 것. 나의 소유물이지만, 나의 책임에서는 멀리 떨어져 버린 것. 과거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과거를 경계해야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토토가’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 중에 이런 게 있었다. ‘이런 게 바로 춤이고 노래다. 요새 가수들의 춤, 노래가 춤, 노래냐? 보고 좀 배워라.’ 내용을 정확히 기억하진 못하지만 이런 맥락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90년대 가수들은 현재의 가수들과 달리 질적으로 우월했는가? 나는 쿨이나 터보, 혹은 김현정의 춤이 율동과 다른 점을 찾지 못했다. 굳이 찾자면 아기자기한 율동과 달리 동작을 과격하게 하거나, 숨이 차 ‘헥헥’거리는 정도? 또한, 김성수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정말 ‘뮤지션’인가. 그는 가수나 댄서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까?

 

물론, 추억에 젖어 열광하는 게 문제는 아니다. 밤마다 집에서 자기 골동품을 만지는 게 무슨 문제랴. 하지만 문제는 자신의 주관을 마치 객관적인 것 마냥 인식하(려)는 데 있다. 값싼 자기만의 골동품을 남들에게도 인정받으려는 심리가 문제다. 개념어를 싫어하시는 분이 많은 것 같지만, 이는 마르크스가 말한 ‘페티쉬’이고 루카치 식으로 말하면 ‘물화’다. 그건 일종의 폭력이다. ‘토토가’에 대한 이런 비뚤린 열풍은 ‘토토가’(와 넓게는 90년대)를 사실상 숭고한 중심에 올려놓는다. <국제시장>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과거도 마찬가지다. 달리 말하면 지금의 ‘복고’란 일종의 이데올로기, 신, 혹은 왕이다. ‘복고’를 향유하는 세대에게 ‘복고’는 그들을 하나로 결집하는 코드다. 여기까진 문제 될 게 없다. 하나님이나 알라신을 믿는 게 무슨 잘못일까. 하지만 이것을 향유층 너머까지 강요한다면 문제가 된다. 이는 마치 기독교가 무슬림에게 개종을 강요하는 것, 무슬림이 기독교인에게 개종을 강요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쎄시봉>이 얼마나 흥행을 할진 모르겠다. 지금 가장 핫한 배우들이 대거 포진해있다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한효주를 둘러싼 논란으로 봤을 땐 좀처럼 흥행의 가능성을 점치기 어렵다. 하지만 짐작건대, 지금 ‘복고’와 ‘노래’를 다룬 ‘토토가’의 엄청난 흥행에 힘입어 같은 코드를 담은 <쎄시봉>도 적잖은 흥행을 할 것 같다. 비록 그 시대를 살진 않았지만, 당시의 음악에 대한 적잖은 관심이 있는 터라 나도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다만 나는 이 영화가 현재 진행 중인 폭력을 확대 재생산하는 지원군이 되진 않을까, 걱정도 하고 있다.

 

<꿈보다 해몽> (2월 12일 개봉) - 홍상수 넘어서기

 

이 익숙한 포스터는 무엇인가. 우르르 배우들이 프레임 안에 모여 한 곳을 향해 있다. 이건 흡사 홍상수 영화의 포스터가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꿈보다 해몽> 감독 이광국은 홍상수 영화의 조감독 출신이란다. 그는 이미 두 편의 영화를 찍은 나름대로 경력 있는 감독이다.(<로맨스 조>(2011), <말로는 힘들어>(2012))

 

아쉽게도 나는 그가 메가폰을 잡은 전작들을 보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나는 <꿈보다 해몽>에 대해 기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게 맞을 수도 있다. 저번에 쓴 글에서도 밝혔듯이, 기대란 그렇게 쉽사리 품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홍상수라는 이름은 그 모든 것들에 앞서있다. 내게 홍상수라는 이름은 ‘보통명사’다.(<메콩호텔> 영화에서 음악은 무엇일 수 있는가?) 단지 홍상수의 조감독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광국이라는 이름은 내가 아직 접하지 않은 감독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앞서 밝혔듯, 지극히 주관적인 기대다.

 

그러므로 내가 눈여겨볼 것들은 다음과 같다. 이광국은 ‘홍상수’라는 일반명사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포스터에서도 그렇고, 지나치듯 본 예고 영상에서도 홍상수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꿈보다 해몽>은 홍상수의 장점들을 어떻게 잘 살려 나가고 극대화할 것인가. 또한, 이광국은 홍상수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짧게 봤던 그 영상에서 나는 홍상수의 미쟝셴과 소위 홍상수 사단을 떠올렸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것 말고는 딱히 홍상수를 떠올릴 만한 계기가 없었다. 예를 들어 짧은 쇼트나, 샷/리버스 샷(대화할 때 인물의 얼굴을 번갈아 제시)의 활용, 그리고 환상(꿈)이라는 소재는 홍상수와의 변별점이리라. 곧 개봉할 이 영화를 통해 이광국은 ‘포스트-홍상수’을 거쳐 ‘이광국’이 되거나, ‘홍상수의 아류’가 될 것이다. 기대 만땅이다.  

 

<리틀 포레스트> (2월 12일 개봉) - 먹방!

 

무슨 영화의 예고편이 이럴까. 요리하고 밥 먹고 요리하고 밥 먹는 게 전부다. 영화의 서사를 짐작할 만한 단서조차 제시되지 않는다. 하지만 추측건대 이러한 형식이 낯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략 일 년 전쯤부터 ‘먹방’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TV에는 아예 먹방만을 방송하는 카테고리가 생겼고, <식샤를 합시다>라는 본격 먹방 드라마도 방영되었다. 예능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몇 개 적어보더라도 <삼시세끼>, <냉장고를 부탁해>, <수요미식회>, <오늘 뭐 먹지?>. 이렇게나 많다. 그런데 내가 알기에는 아직 영화에서 본격적으로 먹방을 다룬 작품은 안 나왔다. <리틀 포레스트>는 아마 최초의 본격 먹방 영화가 아닐까 싶다.

 

먹방 영화란 무엇일까. 아직 먹방 영화가 없었으므로, 불가피하게 먹방 드라마를 통해 영화를 추측해볼 수밖에 없겠다. 위에서 <식샤를 합시다>(식샤)를 소개했지만, 나는 사실상 진정한 먹방 드라마는 일본에서 방영중인(아마 시즌4까지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고독한 미식가>(고독)라고 생각한다.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식샤>는 드라마를 관통하는 서사가 뚜렷이 존재한다. 인물들에게는 각자에게 맞는 역할들이 부여되고, 그네들 간의 관계가 드라마를 이끄는 원동력이다. 반면에 <고독>에는 사실상 서사랄 게 없다. 매 회가 각각의 독립적인 에피소드로 구성되어있다. 그런데 에피소드랄 것도 없는 게, 지극히 사소한 사건들이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게 전부다. <고독>에서 유일한 주인공인 ‘고로상’에 대한 정보는 간략하게나마 제시되어 있다. 하지만 그나마 빈약하고(물건을 중개하는 회사원 정도?), 나머지 인물들은 매 회 일 일회적으로 등장하고 그친다. 심지어는 식당 주인이 직접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식으로 먹방 드라마에서 인물, 혹은 서사란 곁가지에 불과하다.

 

먹방 영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농촌생활, 혹은 엄마와의 관계라는 설정이 있긴 하지만 영화에서 얼마나 비중을 차지할진 모르겠다. 더구나 일본 작품이라 그런지 왠지 내가 기대하는 수준을 (어떤 의미에서든) 뛰어넘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먹방 영화에 대한 가치 판단은 잠시 미뤄두기로 하자. 아직 먹방 영화가 개봉되지 않았으니. 하지만 먹방 자체에 대해서라면, 나는 별다른 반감을 품고 있지 않다. 나는 옴니버스 영화 <어떤 시선>의 한 단편 <코마>(카와세 나오미, 2009)에서 남자가 쌀겨 절임을 씹던 소리라든지 그들이 둘러앉은 밥상의 풍경과 분위기를 잊을 수 없다. 영화가 일차적으로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는 장르인 이상, 먹방은 영화만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제네시스: 세상의 소금> (2월 26일 개봉) - 빔 벤더스!

 

내가 본 빔 벤더슨의 영화는 <베를린 천사의 시>(1987)이 전부다. 하지만 빔 벤더슨이란 이름은 내게 특별하다. 독일어 알파벳을 배울 때, 나는 영어와는 달리 발음되는 W(베-)음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양순음(입술과 입술로 내는 소리)으로만 알 고 있던 문자가 순치음(입술과 이빨로 내는 소리)으로 발음될 때의 그 묘함.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베를린 천사의 시>(베를린)를 보았을 때 혼자 중얼거리고 몇 번이나 되뇌었던 빔 벤더스(Wim Wenders)는 처음으로 독일어 W를, 그것도 두 번이나 활용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우스갯소리지만, 내게 빔 벤더스란 이름은 정말 문자 그대로 강렬하다.

 

또한 <베를린>에서의 흑색 빛 낭만도 나를 사로잡았다. 어딘가 조악하지만 그래서 더욱더 서정적인 미쟝셴, 혹은 낮게 깔린 남자의 내레이션. 형이상학의 시각화. 사랑에 관한 새로운 시도. 흑과 색의 대비와 조화. <베를린>을 본 이후 나에게 ‘낭만’이란 조금 더 음울하지만, 더욱더 애잔한 뉘앙스를 품은 개념으로 바뀌었다.

 

더구나 빔 벤더스의 다큐멘터리라니! 최근에 <액트 오브 킬링>(조슈아 오펜하이머, 2013) 혹은 쿼바디스(김재환, 2014)에서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흠뻑 느꼈다. 빔 벤더슨의 서정성이 다큐멘터리와 융화되면 어떠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지 기대된다. 물론, <제네시스>를 보기 전에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빔 벤더스, 1999)로 빔 벤더스의 다큐멘터리에 대한 선행학습을 해야겠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사진출처: 다음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