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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나, 다니엘 블레이크> 켄 로치가 삶의 무게를 말하는 방법

 

영알못(영화를 알지 못하는 사람)2016년 칸 황금종려상까지 받은 영화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는 것 자체가 희극에 가까울 수는 있으나, 엄밀히 말해 영화 <,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화의 영상미나 극적 구성 측면에서 새롭거나 참신한 시도를 보여준 것이 없다. 으레 그랬듯이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 - 더 자세한 확인은 힘들지만, 아마도 신인들 - 을 쓰고, 플롯 자체가 확 튀는 구성도 아니다. 몇몇 움찔하게 만드는 부분들은, 사실 클리셰에 가까운 무엇. 다만 <,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면서 든 생각은, 이 영화에 다큐 3일이나 인간극장의 자막에 깔려도 크게 이상하게 여겨지진 않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영화지만, 어쩌면 저 멀리 영국 뉴캐슬 어디에서 실제로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별로 위화감이 없을 것만 같은 영화, <, 다니엘 블레이크>.


 

영화와 다큐멘터리 그 중간 어디쯤에서 켄 로치는 의뭉스럽게 자신이 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가 시종일관 공격적으로 바라보는 사회와 국가, 그리고 악의 축과 같은 민영화와 결합된 관료제는 다소 과장된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본질적 문제마저 흐리진 않는다. 현실과의 차이는, 보이지 않는 폭력의 형태의 현실을 그저 보이게 드러낸 것일 뿐. 심장병 환자여서 일할 수 없는 다니엘 블레이크가 제도적 맹점으로 인해 일거리를 찾아 거리를 돌아다니는 모습은, 어쩌면 드러나지 않은 현실이 더 영화 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애가 둘인 이혼모 캐서린, 슬럼가의 옆집 흑인, 관료제 시스템 하의 인간들, 마트, 공장, 거리는 뉴캐슬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되지만, 사실 그곳은 굳이 뉴캐슬이 아니어도 된다. 영화 속의 도시는, 브렉시트라는 세계적 이슈로 시끄러운 영국의 우리가 체감할 수 없는 삶 그 자체이자, 동시에 매우 보편적인 세계의 이면이다. 초반에 다뤄지는 빈곤의 무게는 곱상하지도, 그렇다고 추접하지도 않다. 허기에 캐서린이 푸드뱅크의 깡통캔을 뜯어 허겁지겁 퍼먹는 모습이 나오기 전까지는, 가난한 삶 역시도 그저 잔잔한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이후 영화는 우리에게, 뉴스 이면의 삶들을 직접 보라며 우리의 등을 떠민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바스라진다.

 

<, 다니엘 블레이크>가 보여주는 또 다른 시각은, 인터넷이라는 신문물의 발달의 그림자다. 다니엘은 옆집 흑인 총각의 집에서 광저우의 찰리와 함께 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23일을 고생한 끝에도 쓸 수 없던 고용보험신청서를 완성해내지만, 그럼에도 40년을 목수로만 일한 다니엘에게 인터넷은 너무 멀고 어렵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소외되는 다니엘들은 점점 더 많아진다. 직원들로 대표되는 관료제 시스템은, 사람을 향하기보다는 시스템 그 자체에 함몰되고, 외려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들을 책망한다. 우리가 수치와 데이터를 통해서는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그 모든 것들 - 복지와 체계적 행정, 인터넷의 발달 - 의 명암을, 영화는 기어코 수면 위로 끄집어낸다. 가난한 이들의 연대와 애정은 따뜻하지만, 영화는 그 판타지마저 기어코 산산조각 낸다. 그렇게 영화의 유일한 판타지는, 관료제 시스템에 아날로그적 방식의 저항으로써 다니엘이 자신의 이름을 쓸 때뿐이다. 그마저도 절망으로 떨어뜨리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지만.

 

뻔한 이야기, 뻔한 내용, 뻔한 현실의 결합.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뻔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바로 감독 켄 로치의 힘이다. 켄 로치는 삶의 무게를 말하는 대신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것이 아니게 만든다. 그렇게 영화는, 영화가 아닌 빈곤한 삶 그 자체가 된다.

 

By 9.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