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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3인의 현상범들

[3인의 현상범들] #5 실패작



[소르피자.txt]


이것은 에어컨이다. 이것은 히터다. 이것은 둘 다 될 수가 있다. 지름이 30센티도 안되어 보여 약할 것 같지만, 이 작은 기계 하나만 건물에 있어도 모든 층에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과, 겨울에는 따뜻한 바람을 제공해줄 수 있다. 누군가는 이것을 보고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사우론’이라 말할 지도 모르겠지만, 이는 기술혁신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나 하는 말이다. 그런 자가 있다면 더운 여름날 옥상에서 ‘사우론’을 닮은 메론 맛 눈깔사탕을 빨아먹으며 그 사탕이 입에서 녹을 때까지 엎드려뻗쳐를 하고 그것이 끝나자마자 호빗처럼 맨발로 63층 건물을 계단으로만 내려와야 할 것이다. 

밑 부분은 왜 녹색으로 칠해져 있냐고? 아 그건, 여름이 너무 더워서 옥상에 있던 우레탄이 녹아 기둥을 타고 올라와서 그런 것이다. 그래도 보기가 좋지 않나? 녹색은 자연을 뜻하는 색이기도 하고, 눈을 안정감 있게 해준다. 아마 다음 시리즈부터는 화이트 말고도 여러 가지 색상을 추가에 심미적인 부분까지 신경 써야 되겠다. 

아 물론 경량화도 이미 진행 된 상태다. 시제품이지만, 가정집에서 쓸 수 있도록 만든 미니어처 시리즈는 그 크기가 바늘만 하다. 바늘구멍만한 크기에서 나오는 바람이 온 집안을 원하게 해줄 수 있다니. 얼마나 혁신적인가. 그러니깐, 이 제품은 전기 사용에 있어서도 혁신을 가지고 왔다. 기존 에어컨에 비해 전력을 1/1000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같은 파워를 낼 수가 있다. 내가 하는 말이 다 거짓말 같다고? 싫으면 믿지 말던가. 하지만 당신은 이 제품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당신이 춥고 더운 건 이 제품을 통해서만 해결 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은 에어컨이다. 이것은 히터다. 여기에는 아무런 토를 달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건 에어컨이고, 히터로 만든 제품이니깐. 



[호래.txt]


 너가 말한 게 저거야? 

 응.

 저게 무슨 잠망경이냐 새꺄. 

 저거 잠망경 아니야? 

 에이 그럼 이러 저리 움직이겠지. 저건 가만히 있잖아. 생각을 해봐. 몰래 숨긴 눈깔을 꺼냈으면 이리저리 움직이지, 한 군데만 바라보겠냐? 나뭇가지 같은 거겠지.  

 영수가 망원경을 내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젠장. 승급전이였는데. 잠수함은 뭐가 잠수함이야. 그냥 게임이나 할 걸. 

 밤바다엔 파도 소리만 그득했다. 나는 아쉬움에 다시 한 번 망원경으로 바다를 살폈다. 

 됐어. 그냥 가자. 

 영수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나는 강한 손길로 영수를 다시 앉혔다. 

 저거 봐봐. 그 ‘나뭇가지’ 사라졌어.

 영수는 조용히 내가 건넨 망원경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시발 진짜네. 영수가 내 팔을 잡아끌면서 말했다. 그냥 가자 이제. 이젠 진짜 무섭다. 내가 영수를 따라 일어나려는 순간 바닷물이 갈리더니 거대한 검은 형체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시발 진짜 잠수함이잖아. 

 토껴. 토끼고 신고하자. 

 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영수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단지 나지막이 이런 소리를 중얼거릴 뿐이었다. 

 드디어 왔구나.

 그게 내가 영수에게서 마지막으로 들은 목소리였다.  



[학곰군.txt]


윽.


  단 한 마디뿐이다. 제길... 이나 분하다! 같은 대사도 내겐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최선을 다한다. 배에 차고 있던 혈액팩(아마도 물감이지 싶다.)에 구멍을 내고 그대로 쓰러진다.

  사인은 관통으로 인한 과다출혈. 옷이 더러워지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지만 확실히 타살보다는 낫다. 일면식도 없는 이들의 발길에 채여 눈을 감는 꼴은 몸 아픈 것은 차치하고라도 상식으로 용납이 안 된다. 때리는 놈도 일당 5만원. 맞는 놈도 5만원이면 안 맞는 편이 낫다.

  탕! 하는 격발음 후 우리는 순서에 맞춰 정해진 자세로 쓰러져야만 한다. A가 좌측으로 B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면 뒤에서 덮치려던 C는 갑자기 뒤를 돌아보는 주인공에게 근거리에서 배때지에 한 발 박히고 2미터 정도 날아가 땅에서 두 바퀴 구르는 것이다. 포인트는 피를 바닥에 질질흘리면서 실감나게 날아가는 것. 그리고 C 배역만 안 걸리기를 간절히 비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나는 C에 배정되었고 주연배우 K씨의 뒷모습을 보며 촬영사인이 날 때까지 대기하게 되었다. A와 B역할과는 한 앵글에 잡히지 않기에  그들의 연기를 먼저 볼 수 있었다.

  K씨는 능숙하게 그러면서도 절망적이게 총질을 했다. 그가 현장에서 쏜 공포탄은 우리 같은 수많은 ABC의 몸을 통과했다. 소리 뿐이지만 우리는 정말로 아팠다. 말 한 마디없이 뒹굴다가 축 늘어졌다.

  오케이 사인이 나고도 난 한참이나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소리뿐인 총알로 배에 구멍을 뚫을 수는 없다. 소설이였다면 '배에 구멍이 뚫린채로 집으로 돌아갔다.'고 마무리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뻘건 것이 잔뜩 묻긴했어도 배는 멀쩡했다.

  구멍이 난 건 오히려 눈이었다. 줄줄줄 물이 새어나왔다. 다음 장소로 가야하는데...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해야할 일은 분명히 있는데...

  A와 B가 피를 철철철 흘리면서 나에게 왔다. 아저씨 괜찮아요? 라고 묻는다. 나는 눈물을 보이기싫어 바닥에 고개를 처박아버린다.

  왜 우냐고 묻는 그들의 질문에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오해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었다. 대강 시나리오가 나오지 않는가. 오랜시간 무명배우를 한 C의 한맺힌 눈물. 혹은 어릴 적 트라우마가 떠올라서 온 발작. 어느 쪽이든 워딩은 훌륭했다.


  이 시간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수 백명이 움직이는 현장에서 엑스트라가 아닌 메인 스포트라이트 핀조명을 받는 것은 지금뿐일 게다. 나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헛된 죽음이 아니고 싶었다.



[현상소.jpg]




[벼.txt]


1.


성균관대학교 명륜 캠퍼스 중앙도서관은 언덕배기 끝무렵에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습니다.

이 사진은 그 건물 옥상정원에서 찍었습니다. 아시는 분만 아시겠습니다. 사진을 좀처럼 놓을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친숙한 공간을 낯선 공간으로 뒤바꾸기, 보편적인 공간 속에서 은밀한 공간 찾아내기.

그런데 이 사진이 ‘정원’을 담았다고 하기에는 ‘뭐 이리 황폐해’라고 느끼는 분도 있으리라 봅니다. 예, 엄밀히 말하면 옥상 정원 옆에 딸린 곳입니다. 정갈한 벤치, 초록빛 잔디로 이뤄진 ‘자연스런’ 정원 옆에 하양과 초록 둘로만 이뤄진 또 ‘부자연스런’ 세계가 있더군요.

그런데 이 사진은 제목 그대로 ‘실패작’입니다. 애초에 저 요상한 물체를 찍으려고 했던 것은 별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한 동그라미. 앞뒤로 난 저 동그란 구멍을 일치시켜 완전한 동그라미를 찍고 싶었습니다. 이를 위해 심지어 드러눕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저 결과물 좀 보십시오.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2. 또는


아니, 나는 자네와 가지 않겠어. 사범을 따라가겠어. 미쳤어? 그 나이에 무슨 약장사를 하겠다는 거야? 그는 완전한 사람이야. 죽을힘을 다해 일하고 그 대가로 먹고살아. 그가 파는 기생충 약은 가짜가 아냐. 내가 무서워하는 것은 자네의 마음이야. 가, 막지 않겠어.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 조세희, <뫼비우스의 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