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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만무려의 모욕’ 속에서도

[서평] 김수영을 위하여

 

 

쓰기에 앞에 고백하자면, 강신주 책의 서평을 쓰는 이는 정작 강신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좋아‘했었’지만 이제는 좋아하지 않는다.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과 <강신주의 맨 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에 삶의 많은 빚을 졌을 때에도 그의 알 수 없는 폭력성은 껄끄러웠다. 내게 있어 그는 마치 모두를 단죄하려는 세례 요한을 꿈꾸지만, 정작 기준에 따라 스스로마저 단죄해야 함에도 스스로에게는 절대로 칼을 댈 수 없는 뻔뻔한 옛 애인과도 같은 존재다.

 

그럼에도 오늘의 글 역시 그에게 빚을 져야 한다. 모든 게 끝이 나도 지워낼 수 없는 것이 애증이듯, 그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강신주라는 거울을 통해 비춰진 “김수영을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김수영을 위하여>는 제목 그대로 시인 김수영을 위해 쓴 글이자, 동시에 작가 자신이 작가 자신에게 삶에 영향을 주었던 김수영을 그리는 책이기도 하다. 그래서 책 속에서 김수영은 시인이었던 김수영의 삶 전체를 나체로 드러내는 동시에, 작가에 의해 새롭게 해석된 김수영이 아닌 시뮬라크르-김수영이기도 하다.

 

원전 텍스트를 통해 드러난 김수영이 우리의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무소의 뿔 같은 모습이라면, 작가를 통해 해석되고 다시 드러나는 김수영은 매우 인간적인 존재다. 전쟁의 참화는 그의 영혼 깊숙한 곳에 상흔을 남기고, 그는 평생을 그 고통 속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버둥대며 투쟁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배열된 텍스트를 통해 구현된 김수영의 삶은 위대한 시인 이전에 운명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너무나도 연약했던 인간의 모습 그 자체다. 그건 가끔 너무 초라해서 억지로 발겨 벗겨져 거리로 내몰린 듯한 느낌마저 준다.

 

처음 읽었을 땐 감동이었던 그 서술들을 다시 보는 지금, 그 서술들 속 김수영은 마치 화려한 로-씨아식 프로파간다들로 펄럭이는 깃발 속에서 억지로 화장을 한 채 풀려나온 원숭이와 같은 모습마저 느껴진다. “억만무려의 모욕”을 말하며 인생을 곱씹었던 시인에 대한 네크로필리아적 부관참시일지도 모른다. 인생의 고난 끝에서 끝끝내 뿌리째 밀고 나온 위대한 인문학 정신 그 자체라는 평가는, 지극히 합당하지만 동시에 다소 낯부끄러운 말이다. 여전히 잘 쓴 책이고, 많은 부분에서 동의할 수 밖에 없는 좋은 해석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그럼에도 이 책은 ‘김수영을 위한’ 책이 될 수는 없다. 책은 어디까지나 ‘김수영을 위하는 강신주를 위한’ 책이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위대한 이들의 숙명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모욕과 찬양 속에서도 김수영의 글들은 여전히 빛난다. 내가 만약 아직도 강신주를 좋아했다면, 그의 사랑으로 넘치는 김수영에 대한 글들 역시 삶 속에 그대로 남았을 것이다. 다만 스스로 의미를 잃음으로써, 그 빛났던 묘사들이 이제는 내 것이 아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김수영을 위하여>는 개인적으로는 애증 속에서도 빛나는 사랑, 에 대한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빚진 것을 청산하지 못한 채 강신주와 강신주가 그려내 준 김수영을 사랑하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억만무려의 모욕과 찬양 속에서도 여전히 김수영은 빛난다. 사랑했던 손가락 대신 달을 봄으로써 삶은 한 발자국씩 스스로 앞으로 나아간다. 아직 스스로 달의 모습을 그려내지는 못해 흘끔흘끔 손가락을 볼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달은 원래부터 예뻤고 손가락도 방향은 맞으므로 나름 괜찮다고 생각한다. 짧은 식견의 한계 탓이겠지만 지금 당장은, <김수영을 위하여>를 넘는 김수영을 위한 대중적인 책은 없을 듯싶다. 애증 속에서도 다른 사랑이 올 때까지, 옛 사랑의 사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By.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