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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밀정>이라는 회색지대에서 발견한 색다른 세 가지 포인트

※ 영화 <밀정>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말이다. 햇살이 창틈으로 내리 쬐는 것에 맞춰 느긋하게 눈을 뜬다. 오전 9시, 모닝커피 한 잔 내려놓고 음악을 튼다. 1920년대 재즈인 루이 암스트롱의 'When you're smiling'이 흘러나온다. 한가롭게 커피와 음악에 취해본다. 행복한 주말의 시작이다. 



우리가 늘 꿈꿔온 주말 아침의 풍경이다. 그런데 위의 문단은 1920년대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투신한 의열단을 다룬 영화 <밀정>과 연결고리가 있다. 힌트는 1920년대 재즈가 되겠다. 


밀정은 <장화, 홍련> <악마를 보았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등의 영화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온 김지운 감독의 신작이다. 조선인 출신 일본경찰 이정출(송강호 분)이 당시 무장독립운동 단체 의열단의 뒤를 캐다 핵심 일원인 김우진(공유 분)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정출은 경찰과 의열단을 오가는 ‘회색지대’인 밀정이 되고,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가에 대한 고뇌가 표현됐다. 그래서 영어 제목은 The Age of Shadows(그림자의 시대)인가 보다. 

영화는 실제로 1920년대 당시 일본경찰이면서 동시에 의열단을 도운 것으로 판단되는 인물 ‘황옥’과 그 주변의 실존했던 독립투사 김시현, 현계옥, 김원봉을 연상시킨다. 사실 확인이 안 된 부분도 있어 조심스럽지만 영화는 사실관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아울러 아팠지만 통쾌한 결과를 그리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했다. 


이 모든 것을 무사히 그려내게 만든 힘으로 송강호와 그를 중심으로 탄탄한 연기를 선보인 배우들이 있었다. 또한 밀정은 2015년의 <암살>만큼 호쾌하고 신나지는 않지만 차가운 분위기로 진행되는 이야기에서 최동훈 감독의 영화와는 차별점을 보인다. 색다른 방법으로 가슴이 뜨거워지고 싶다면 이번 주말, <밀정>을 권하고 싶다.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사실과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송강호의 뛰어난 연기력(영화를 함께 본 이는 밀정에서 송강호가 법정에서 진술하며 우는 장면을 보며, “심지어 그의 고르지 않은 치열까지 아름다워 보이는 연기였다”고 증언했다)은 논외로 해두고, 영화적으로 흥미로웠던 것 몇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1. ‘부산행 KTX’에서 ‘경성행 기차’로 바꿔 탄 공유 

2016년은 영화배우로서 공유를 각인시킨 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영화 <부산행>의 KTX에서 이기적이기 그지없던 소시민이 좀비와 사투를 벌이며 성장하는 모습을 성공적으로 선보이더니 이번 경성행 기차에서는 의열단의 폭탄 운반조직 리더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공유는 두 작품 모두 기차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부산행에서 좀비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짐칸으로 기어가던 그가 밀정에서는 일본경찰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아기의 배변까지 손수 치우는 모습을 보였다. 기차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공유는 목적지에 무사 도착하기 위해 자신만의 방법으로 사투를 벌인다. 때론 마동석/송강호와 진지하나 웃음이 터지는 순간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육탄전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두 작품을 연이어 본다면 석우/김우진에게서 외려 공유의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 다소 머뭇거리고, 차분하게 보이는 그의 얼굴에서 내면의 강한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다. 이제 공유는 로맨스물의 스타가 아니다. 시대극과 장르물에서도 어엿하게 극을 이끌어 갈 힘을 얻은 것이다. 

2. 유일한 ‘여성’ 한지민과 ‘절대 악’으로 분한 엄태구 

한지민은 영화에서 유일하게 의미 있는 여성 인물로 등장한다. 실제로 폭탄 운반 작전에 기여한 의열단원 현계옥을 모티브로 한 연계순 역으로 분한 것. 하지만 연계순은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영화의 초점이 ‘밀정’인 송강호와 공유에 맞춰졌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 영화를 다 보고 나왔을 때 한지민의 역할 분량이 불만이었다. 영화 <암살> 속에서 1인2역으로 분하며 맹활약을 펼친 전지현과 달리 한지민은 말도, 행동도 많이 보여주지 못하고 고문당하다 곡기를 끊고 세상을 떠나는 독립투사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계순이 등장한 장면들을 다시 곱씹어보면, 어쩌면 그가 가장 기개 있는 인물로 그려진 듯 하다. 그는 독립투사로서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했고, 가장 잔인한 고문도 견뎌낸 끝에 타협하지 않고 숨을 거두는 인물이 되었다. 실제로 현계옥은 폭탄제조, 사격, 영어 등의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함께 영화를 본 이는 연계순의 비중에 대해 이건 오히려 영화 속 남녀 역할을 이미 구분한 상태로 봤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모두 독립운동을 한 ‘사람’으로서 본다면 남녀 비중보다 더 중한 것이 있다는 것. 나는 그의 비판에 동의한다)

한편 절대 악으로 분한 엄태구는 어떨까. 그는 이정출과 함께 일하는 일본경찰 하시모토로 등장한다. 밀정이 된 이정출을 견제하는 역할이다. 엄태구는 등장부터 퇴장까지 섬뜩한 ‘절대 악’으로 충분히 제 역할을 다한다. 억양과 호흡이 붕괴된 그의 말투는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함을 있는 힘껏 제공한다. 김지운 감독도 무비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캐스팅을 중요 포인트로 짚었다. 밀정을 보는 내내 당신의 시선을 사로잡을 인물임이 확실하다. 

3. 아이러니한 음악 

이제 서론에서 말한 힌트의 정답을 말할 시간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루이 암스트롱의 'When you're smiling'을 들어보길 바란다. 영화 속에서 이 음악을 발견했을 때, 상상한 것 이상의 아이러니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은 낭만적인 멜로디와 연주, 그리고 가사를 담고 있다. ‘당신이 웃을 때, 온 세계가 함께 웃을 것’이라는 가사에 행복감을 느끼지 않을 이는 없을 것이다. 이 노래는 1920년대 미국이 호황이던 시절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 한국은 어땠는가. 김지운 감독을 이 노래를 독립군이 잡혀가고, 고문을 받고, 괴로워하는 장면에 배경음악으로 삽입했다. 음악은 행복한 데 영상은 괴롭다. 음악과 영상은 한 시대로 이어져있다. 


이런 해학의 느낌은 다른 작품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2015년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앵그리맘>에서도 이런 장면이 있었다. 주인공 김희선이 비리를 교육청에 고발하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은 빅밴드의 ‘재즈’였다. 진지한 순간이지만 음악은 발랄했다. 이렇게 우리는 아이러니한 장면들로부터 ‘해학’을 발견한다. 밀정에서도 이런 기운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 


역사를 다루고, 굵직한 배우들이 출연했으며, 다양한 연출이 가미된 밀정은 보고 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지는 영화다. 그런 점에서 ‘회색지대’를 충실히 그려냈다고 할 수 있다. 검정과 흰색이라는 극단이 아닌 회색처럼 애매한 상황일 때 우리는 이야기할 거리가 많아진다. 그렇기에 밀정은 성공한 영화다. 


by 건 


사진 출처 : 영화 <밀정> 스틸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