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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엽고 사랑스런 벤야민

[서평] 모스크바 일기

 

 

사랑할 수밖에 없는 벤야민! 자못 심각하고 무거운 얼굴들로 알 수 없는 이야기만 설교하듯 건넬 것만 같은 무수한 사상가들의 책들 가운데서, <모스크바 일기>는 그 이면에 숨겨진 우리와 같이 웃고 울고 숨 쉬는, 다소 찌질한 듯 귀여운 인간의 생생한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책이다.


 

발터 벤야민의 ‘일기’는 그가 사랑했던 여인 아샤 리시스를 좇아 모스크바에서 보냈던 날들에 대한 기록이다. (책에서 드러나진 않지만) 그녀는 신경쇠약증으로 인해 모스크바에서 요양 중이고, 그렇기에 벤야민은 그의 옆을 지키는 파트너 베른하르트 라이히와 함께 그를 만나러 가는 일이 많다. 동시에 수많은 주석들이 말해주듯 벤야민의 일상은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과의 교류로 이어진다. 그는 그곳에서 박물관을 탐방하고 도시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연극들을 보며 그에 대한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게 분석들을 남긴다. 그가 생각했던 사상이나, 이론, 책들의 흔적 역시 책 곳곳에서 그 맹아를 드러낸다.

 

하지만 다소 딱딱할 수 있을 이러한 벤야민의 일기가 의의를 갖는 것은, 이 ‘일기’가 거의 최소한의 필터링 - 시간차 등 스스로에 의해 이루어졌을지 모를 자기검열 - 을 제외하고는 그가 가졌던 생각들을 거의 날 것 그대로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수많은 신경질에도 불구하고 아샤에 대한 그의 사랑과 구애를 그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의 파트너인 라이히와의 생활과 대화를 통해 스스로의 생각을 발전시키며 글을 써내려간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시각에서 기록으로 남긴다. 그렇기에 다소 순수하고 바보 같아 보이는 서술자의 입장에서 써진 미묘한 관계들은, (정작 글을 쓴 본인은 눈치 채지 못하는 듯 하지만)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기묘한 긴장 관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 작은 세계를 넘어서서도 발터 벤야민의 서술은 멈추지 않는다. 같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인 아도르노와 같은 느낌으로, 벤야민 역시 그가 가진 특유의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적인 부분들이 그의 글을 통해 여실히 드러낸다. 모스크바를 묘사하는 그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보지 않아도 그려지는 듯한 1926년 12월부터 1927년 1월까지의 모스크바를 볼 수 있다. 마치 모스크바라는 거대한 무대를 두고 벌어지는 일들을 묘사하는 연극을 보는 듯한 인상이다.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풍경, 거리, 연극, 그림 등 모든 것들은 마치 숨겨져 있던 소품이 조명을 받는 것처럼 그의 글을 통해 생생히 드러난다.

 

그를 통해 다시 상영되는 모스크바는, 분명 우리가 동시대를 살아갈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벤야민은 우리를 그가 살았던 1926, 1927년의 모스크바로 우리를 이끈다. 그의 예민한 시각과 섬세한 묘사라는 묘약으로 불러일으킨 글의 기적이다.

 

우리의 주인공 벤야민은 자신이 작가이자 주인공인 일기 속에서도 자신의 이야기임에도 그 자신이 얼마나 허당인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는 마치 순수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다. 난해한 사고과정이 이어지는 과정에서도 마치 어린 꼬마 아이와 같은 그의 모습들이 드러나는 부분들은 웃음을 터져 나오게 만든다. 강렬하진 않지만 간간히 실소를 불러일으키는 그의 유머는, 그것이 의도된 유머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미소를 자아낸다.

 

결국 이 모든 것은 그가 가진 순수한 시각이 가능하게 한 것이다. 불평과 투정이 있고, 끝끝내 실망은 있을지라도 그에게 절망은 없다. 끝내 울음이 터질지라도 모스크바 안에서 그는 자신을 잃진 않는다. 사소하게는 연극에 대한 실망부터 크게는 러시아가 보여준 모습 자체에 대한 실망까지 들어있지만,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이 그의 순수함을 파괴하진 못했다.

 

<모스크바 일기>는 뭔가 “발랄찌질귀여움”으로 압축할 수 있는 아름다운 글이다. 책을 읽는 순간, 우리는 벤야민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모스크바 일기>를 읽으며 발터 벤야민을 사랑하게 되는 순간, 그의 비극적인 최후는 그 어떤 비극보다도 더욱 가슴 아픈 일이 되어버린다. 그 자신이 쓴 책 속에서 아직까지도 살아있는 벤야민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존재이기에.

 

By. 9

 

* 사진 출처 : 알라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