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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의 품격

[서평]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이과생에 대해 한국-문과형 사람들이 대개 가진 편견 중 하나는, 그들이 전문성은 갖추고 있지만 그걸 풀어내는 능력은 없다는 것. 이과 대 문과 프레임으로 짜인 많은 이야기 속에서 대개 이과들은 똑똑하기는 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알 수가 없는 이들로 그려지곤 한다. 글에 있어서도 그러한 편견은 반복된다. 글 잘 쓰는 똑똑한 이과생에 대한 로망은 있지만, 그건 심하게 과장해서 말하자면 “무한동력”에 대한 꿈과 같은 것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항상 언제나 그렇듯이, 세상에 똑똑한 사람은 많은 법이다. 나만 빼고.

프리랜서 겸 작가 테드 창의 중, 단편선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SF 소설계에 있어 역작으로 평가받는 작가의 작품집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중국계이자 이공계 출신인 그는, 그러나 보통 범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공상 과학적 이야기를 흡입력 있는 구조와 내용들을 통해 풀어낸다.

 

연결되지 않는 그의 세계 속에서 언어는 골렘을 만드는 것을 넘어 인간을 구원해주는 열쇠가 되기도 하고(‘일흔 두 글자’), 우주인과의 소통을 통해 깨달음을 주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네 인생의 이야기’) 세계의 끝까지 이어진 탑의 끝에서 세계는 이를테면 클라크의 병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고(‘바빌론의 탑’), 천사와 타락천사가 일상적으로 강림하며 기적과 천국, 지옥이 손에 닿을 것 같은 곳일 수도 있다.(‘지옥은 신의 부재’) 모든 깨달음이 사실은 0과 같은 곳일 수도 있고,(‘이해’) 과학의 발전이 에셔의 손처럼 서로 맞물리기도 하며(‘인류 과학의 진화’), 미모에 대한 감각을 떨어뜨림으로써 진정한 미에 대한 깨달음을 추구하려는 이들과 이를 막기 위한 이들 사이의 사회적 갈등을 다큐멘터리처럼 지켜볼 수도 있다.(‘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 다큐멘터리’) 서로 이어지지 않는 이 모든 상상들이 각각 펼쳐지지만, 테드 창이라는 거대한 숲 아래서 모든 이야기들은 서로 조화를 이룬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마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를 연상케 하지만, 테드 창이 그려내는 그 세계는 베르베르의 그것보다 훨씬 광대하다. 갖고 싶은 문장까지는 아니지만 깔끔하고 담백한 문장은 글에 빨려가는 듯한 느낌을 주고, 그의 놀라운 상상력에 힘을 더해준다. 모든 가정(IF)에 대한 그의 나름의 대답들은 언제나 알쏭달쏭해서 확신을 주진 않지만, 그렇기에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대답을 더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준다. 그의 세계관 속의 세계는 완벽한 가상이라는 느낌을 주지만, 그걸 읽는 독자는 마치 VR을 하는 것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똑똑한데다 상상력까지 풍부한 글 잘 쓰는 천재형 이과 작가는 이길 수가 없다. 그건 글을 쓰려는 사람도 읽으려는 사람도 같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슬픈 자괴감을 안겨주지만,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뭐 그래도 괜찮아. 어쩔 수 없지’라는 생각마저 안겨 주는 소설이다. 오래된 책인 만큼 혹시라도 찾아보기도 어렵고, 들어본 적도 없는 오래된 SF라고만 생각한다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일이 없다. 테드 창의 소설은 마치 미래를 내다본 예언서처럼 현재를 넘어서 미래의 고민까지 미리 담아놓은, 뜨거운 현재 진행형 글이다.

 

By 9.

 

* 사진 출처 : 알라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