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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유쾌하면서도 불쾌했던 <내부자들>

*일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완연한 겨울이다. 벌써부터 거리엔 크리스마스 준비가 한창이다. 집 앞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도 이제 보이지 않는다. 추운 날 가장 머무르기 좋은 장소는 (집을 제외하면) 영화관이다. 극장에서 연인의 손을 잡든,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가든, 그냥 팝콘을 먹든 관객의 시선은 스크린을 향한다. 각각의 주체가 철저히 독립적이면서도 같은 공간을 바라볼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극장이다.

대개의 경우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시원섭섭함을 느끼게 된다. 꽤 오랜 시간 서사의 처음과 끝을 목격했다는 점에서 시원함을 느끼고, 그 서사가 현실이 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섭섭함을 느낀다. <내부자들>은 후자가 좀 더 강할 것이라 예측했던 영화였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 느낀 감정은 시원섭섭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원하지도 섭섭하지도 않은 묘한 감정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내부자들>은 그리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간단히 영화의 내용부터 살펴보자. 정치깡패 안상구(이병헌 분)와 정의를 외치는, 그러나 출세를 지향하는 검사 우장훈(조승우 분) 그리고 조국일보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 분)의 갈등이 영화의 중심이다. 영화의 장르는 안상구의 대사에서 엿볼 수 있듯 “화끈한 복수극”이다. 배신당한 안상구가 출세를 지향하는 우장훈과 결탁해 이강희와 정재계 인사들에게 칼날을 겨냥하는 것이 영하의 중심 서사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정치권과 기업의 결탁을 자극적으로 그려내고, 왜곡과 여론 호도를 일삼는 언론을 비판한다. 정재계 인사들이 연예계로부터 성상납을 받고 위기를 막기 위해 언론을 통해 여론을 조작하는 모습은 기시감을 준다. 거칠게 말하자면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장면들이 줄지어 등장하는 것이다. 현실의 재현은 영화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만으로 연출이 없네, 반칙이네 등등을 이유로 영화를 비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연출이 좋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는 가능하다. 물론 나체로 등장하는 여인들을 줄지어 세워 남성이 간택하는 장면에 대해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이 장면의 등장을 통해 감독이 제기하려는 문제의식이 어느 정도 드러났는지를 따져보자는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한결같이 표면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즉, 우리는 그들의 쾌/불쾌를 미루어 짐작할 수만 있다. 바로 이 지점이 <내부자들>의 한계다. 권력자를 사정없이 비판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성적인 시선에서만 머무른다.

 

영화 말미에 안상구와 인연이 있는 주은혜(김지현)의 죽음 역시 비슷한 기능을 한다. 말하자면 영화에서 여성은 권력의 비정함과 잔인함을 확연히 드러내게 하는 도구적 위치로만 존재한다. 드라마 <송곳>의 대사를 패러디해 차용하자면 ‘시시한 강자’의 싸움을 위해 ‘시시한 약자’를 발가벗기고 입을 틀어막은 듯한 느낌마저 준다. 그런 싸움의 승자가 좀더 정의에 가깝든 정의에 가깝지 않든 그것이 무슨 소용란 말인가. 영화 속 내부자들의 범주에는 여성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없다. 영화 속 주옥같은 명대사를 따라하며 통쾌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쾌함을 느꼈던 건 또 다른 경계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by 락

 

*사진 출처: 쇼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