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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지극히 주관적인

지극히 주관적인 12월 개봉 기대작 다섯 편

11월 내내 나를 뒤흔들었던 건 ‘연대’라는 단어였다. 달리 말해 한동안 나는 드라마 <송곳>의 여파로 끙끙 앓을 것만 같다.

나를 울렸던 <송곳>의 한 장면. 노동조합에 막 가입한 한 계산원은 두려움 때문에 쉽사리 조끼를 입지 못한다. 그녀는 남몰래 옷을 갖고 계산대에 간 뒤, 쭈그려 앉는다. 동료들의 시선을 피해 조끼를 꾸역꾸역 입은 뒤에도 그녀는 쉽사리 일어서지 못한다. ‘나 혼자’라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눈을 질끈 감고 일어섰을 때, 그러나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하나같이 노조 조끼를 입은 계산원들은 별 말 없이 미소 짓고 있었으나, 그들은 단지 ‘너는 혼자가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데 나에게 연대라는 단어의 이미지는 단단하거나 확고부동한 시멘트 같은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건 말랑말랑하고 일회적이며, 있다가도 없는 물구덩이 같은 것에 가깝다. 그러니까 나는 연대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연대는 결코 종교적 신념이 아니다. 나는 그저 가끔씩 연대인지 아닌지 모를, 그런 애매모호한 감정을 ‘느끼’고 말 뿐이다. 연대란 어느 한 순간, 그런 것이 있었나 싶을 정도의 순간적인 감정에 불과하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연대란 현상이며 정념이며, 기표다.

 

그러므로 파업을 시작하기 전에 발을 빼버리는 계산원들에게 나(가 뭐라도 되겠냐마는,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어떠한 배신감도 느끼지 않았다. 중간 중간에 하나둘 씩 나가는 노조원들에게도 마찬가지. 연대의식이란 그렇게 순식간에 불타오르고, 순식간에 휘발되는 것이니까.

 

그렇다고 연대가 아무 것도 아닌 건 결코 아니다. 때론 피상적인 것이 무엇보다 강렬하게 다가오는 때가 있는 법이다. 연대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 비록 ‘역사의 종언’ 이후 사람들은 동물처럼 고립되고 소비에 목메는 존재로 전락했을지언정, 관계 맺지 않는 사람이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연대라는 ‘현상’은 관계를 기반으로 하므로, 결국 인간으로서 연대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연대라는 감정의 연쇄 와중에 가까스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배신 때린 사람들의 연대가 없었다면 노조가, 이수인(지현우)이 가능했을까. “아들, 힘 내!”라는 어머니의 문자 한 줄, 내 등을 살짝 토닥이는 친구의 손짓, 한숨 섞인 나의 토로에 아무 말 없이 술잔을 채워주는 아버지의 주름, 부산국제영화제 당시 낯선 얼굴들에서 하나같이 드러나는 영화에 대한 설렘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런 사소하고 단편적인 연대는 내 존재 자체이며, 앞으로도 연대는 내 주위에서 점멸을 반복할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나는,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닐 테니까.

 

<하트 오브 더 씨> - 12월 3일 개봉

 

불멸의 고전 <모비딕>을 군대에서 읽었다. 벌써 3~4년 전. 미천한 기억력 탓에 전반적인 이미지만 어렴풋이 남아 있지만, 첫 문장만은 선명히 남아있다.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 ‘내 이름은 이슈메일이다.’도, ‘내 이름은 이슈메일일 것이다’도 아닌 저 단 하나의 문장은 방대한 소설에서 섬세히 드러나는 이슈메일이라는 존재 그 자체다.

 

하지만 <하트 오브 더 씨>가 <모비딕>을 영화화한 건 아니다. 영화는 <모비딕>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을 다룬다. 1819년 고래를 잡으러 항해애 오른 에식스 호가 향유고래의 공격에 침몰한다. 이 배에서 살아남은 21명의 선원들이 망망대해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게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관람 포인트)

 

1. 고래!

 

비록 <하트 오브 더 씨>가 <모비딕>의 영화판은 아니지만, <모비딕>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내게 <모비딕>은 향유고래와 이슈메일과 다르지 않다. 활자 속에서 묘사된 향유고래의 이미지를 얼마나 잘 구현해낼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물론 백이면 백 실망할 수밖에 없다. <타이탄>(루이스 리터리어, 2010)처럼. 그건 이미지의 한계일 수도 있고, 테크놀로지의 한계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하트 오브 더 씨>가 한계의 끝, 혹은 한계를 넘어서는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2. 론 하워드 – 테크놀로지와 드라마의 결합

 

<하트 오브 더 씨>의 감독 론 하워드는 일면 로버트 저메키스와 닮은 구석이 있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일반적인 경향을 찾기 어려운데, 특히 그의 영화는 드라마와 영화 테크놀로지 사이에서 진동해왔다. 한 편에 <포레스트 검프>(1994), <캐스트 어웨이>(2001), <매치스틱 맨>(2003), <플라이트>(2013)이 있으면, 다른 한 편에는 <빽 투 더 퓨쳐3>(1990), <죽어야 사는 여자>(1992), <폴라 익스프레스>(2004), <베오울프>(2007) 등이 있다. 또한, 이 두 성향이 동시에 드러나는 영화로 <콘택트>(1997), 그리고 최근 개봉한 <하늘을 걷는 남자>(2015) 등을 꼽을 수 있다. 저메키스의 장점들을 동시에 발휘한 이 작품들은 그의 대표작으로 뽑힐 만하다.

 

론 하워드도 마찬가지다. 그는 <분노의 역류>(1991), <파 앤드 어웨이>(1995), <아폴로 13>(1995) 기술적 혁신을 감행하기도 하였고, <뷰티풀 마인드>(2001), <신데렐라 맨>(2005), <프로스트 VS 닉슨>(2008) 등에서 드라마에 대한 천착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하트 오브 더 씨>는 테크놀로지와 드라마에 대한 그의 열정이 동시에 뿜어져나오는 영화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 그리고 대양의 향유고래.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 12월 3일 개봉

 

사상 최악의 마약 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FBI 요원 케이트(에밀리 블런트), CIA 소속 작전 총 책임자 맷(조슈 브롤린), 작전 컨설턴트로 투입된 정체 불명의 남자 알레한드로(베네치오 델 토로)가 미국 국경의 무법지대에 모였다. 그들은 같은 상황에서 다른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

 

지극히 주관적인 관람 포인트)

 

악이냐, 불법이냐

 

 

영화는 케이트와 맷, 그리고 알레한드로 사이의 긴장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갈등에는 ‘악을 처단하기 위해 법을 위반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영화는 ‘범죄, 스릴러’라는 장르에 비해 비교적 느린 리듬으로 진행되는 듯하다. 하지만 인물들의 첨예한 심리적 대립을 중심으로 하는 서사가 폭력만이 난무한 영화보다 훨씬 긴장감 있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또한, 이런 주제는 아마 첫 ‘살인’ 이후 인류의 끝없는 논쟁거리이기도 하니까.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대호> - 12월 16일 개봉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필패’라는 공식을 <암실>(최동훈, 2015)이 깬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 기세를 <대호>가 이어 갈 수 있을까.

 

일제 강점기. 지산의 산군(山君), 조선 호랑이의 왕으로 불리는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 대호를 전리품으로 가져가고 싶은 일본 고관 마에조노(오스기 렌). 그는 내로라하는 사냥꾼들과 일본군까지 동원하여 대호를 잡으려고 하지만 대호는 쉽사리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자 조선 최고의 명포수, 하지만 총을 더 이상 들지 않는 천만덕(최민식)을 끌어들이게 된다.

 

 

지극히 주관적인 관람 포인트)

 

‘사냥꾼’ 천만덕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하와이 피스톨(하정우)과 영감(오달수)가 없었다면 <암살>은 이렇게까지 흥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둘은 ‘일제-친일-독립운동’이라는 선명한 대립구도를 넘나든다. 그들은 상대가 누구든 돈만 되면 죽일 수 있는 존재다. 달리 말해 그들은 민족적 대립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다. 그런 존재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일제, 그리고 친일파들을 죽이는 것은 그야말로 개인적인 선택으로 비춰진다. 즉, 돈만을 밝히는 하와이 피스톨이 안옥윤(전지현)들을 도움으로써, 독립군들의 (뉴라이트 사학자들에 따르면) ‘테러’는 단순히 민족적 저항을 넘어서 보편적인 정당성을 얻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대호>의 사냥꾼 천만덕은 하와이 피스톨과 비슷한 부류로 보인다. 그는 지리산에서 칩거하는 사냥꾼이다. 은둔하며 살아가는 그에게서 민족적 결의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짐작건대 그는 마에조노의 제안을 듣고 심각한 고민에 빠질 것이다. 대호는 조선의 마지막 호랑기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꿈에 그리던 사냥의 대상이기도 하다. 결국 그는 개인을 버리고, 민족을 선택할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그의 선택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기에, 말하자면 그는 주저하며 ‘조선’을 택할 것이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천만덕의 선택은 보편적인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관건은 사냥꾼으로서의 천만덕과 조선인으로서의 천만덕 사이의 긴장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 12월 17일 개봉 

 

드디어 개봉이다. 영화제를 위해 부러 부산까지 가놓고도 일정상 보지 못한 영화였다.

 

15년 전 가족을 버린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사치(아야세 하루카), 요시노(나가사와 마사미), 치카(카호) 세 자매는 거기서 홀로 남겨진 이복 여동생 스즈(히로세 스즈)를 만난다. 장례식을 마치고 바닷가 마을 카마쿠라로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스즈에게 ‘함께 살자’며 데리고 간다. 

 

 

지극히 주관적인 관람 포인트)

 

역시나, 새로운 (유사)가족

 

<아무도 모른다>(2004), <걸어도 걸어도>(2008),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왔던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이번에도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왔다.

하지만 앞선 세 작품들이 다 달랐듯, <바닷마을 다이어리>도 가족이라는 문제를 넘어서 새로운 생각거리를 던질 것으로 보인다. <아무도 모른다>가 어른과 아이의 경계를, <걸어도 걸어도>가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를,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피(혈연)와 피의 경계를 지시했다면,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증오와 연민 사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역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그의 영화이기도 하다. 어쨌든 가족에 대한 일련의 작품들이 다양한 방면에서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찬사받아 마땅할 것이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 12월 17일 개봉

 

언급할까 말까 했다.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기대작으로 꼽으리란 걸 알고 있으니까. 굳이 나까지? 어쨌든 “왜 <스타워즈>는 없냐”는 핀잔을 덜기 위해서든, ‘그래도 <스타워즈>니까. 짚어주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든, 이렇게 포함시킨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을 것 같다. 이름만으로도 설레지 않는 전설은 없다.

 

 

by 벼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