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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지극히 주관적인

지극히 주관적인 11개봉 기대작 세 편

같은 시간을 함께했던 이들과의 모임에는 남다른 기억력을 뽐내는 사람이 꼭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7년 만에 만난 재수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유달리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왜 걔 있잖냐. 맨날 잠자고, 자습 빼먹고 피시방 가던 놈. 하, 누구더라...” 다들 조용히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때, 뒤늦게 합류한 A가 치고 들어온다. “아, X 말하는 건가? 자습이 뭐냐. 수업도 빼먹고 피시방 돌아다니느라 바빴지. 걔네 무리가 있었어. Z, W, U랑... 맞다, S. 이렇게 넷이서 같이 다녔잖아. 아, 그리고 니네 그거 아냐? Y랑 X랑 잠깐 사귀었던 거.”

 

하나 더 있다. 연례행사처럼 모이는 중학교 동창(회라기엔 초라하지만 어쨌든)회. 술이 한두 잔 들어가면 누구 할 것 없이 B에게 말한다. “야, 오랜만에 출석번호 좀 외워봐라.” 싫은 듯, 귀찮은 듯, 하지만 B는 거침이 없다. “1번 C, 2번 G, 3번 F, 4번 Q....” 어느 날은 이 정도로는 성에 안 찼는지 B가 역으로 우리에게 제안을 하는 게 아닌가. “야, 니네 키 번호는 기억하냐. 개학하고 첫 날에 키 번호로 앉았잖아. 1번 F, 2번 C, 3번이 나였고.. 그때만 해도 진짜 작았지, 4번 R....”

 

이런 놈들의 기억력들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니긴 하지만, 정작 내가 정말로 닮고 싶은 기억력은 따로 있다. 내 글에 종종 끌어들이곤 하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어떤 날을 회상할 때 다른 건 다 모호하더라도 날씨만은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고 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글, 말에는 유달리 날씨에 대한 언급이 잦다. 이를테면 그가 친구에게 “그렇게 살지 마”라는 전화를 받은 새벽에는 유달리 비가 많이 왔었고, 영화 동지 정은임 아나운서가 세상을 떠났던 그 해는 10년 만에 가장 더웠다.

 

날씨로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는 것은 누군가의 이름, 번호를 기억하는 것과 다르다. 중요한 건 여기서 날씨란 기상청이나 일기예보에서 무미건조하게 예측하고, 보도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억과 맞물린 날씨란 지극히 주관적이다. 물론 날씨는 그때 ‘하필’ 그런 상태였겠지만,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인과의 틀 속에 대입하던 내게 날씨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므로 날씨로 어떤 시간, 공간, 사람을 떠올린다는 것은 그날, 거기서, 그 사람과 함께했던 분위기와 느낌을 전체적으로 떠올린다는 것과 같다. 이 얼마나 근사한가. 10월의 마지막 날, 11월부터는 하루하루 날씨를 유심히 기억해두리라는 다짐을 해본다. 아니, 오늘부터 시작해볼까.

 

 

“지극히 주관적인 11월 개봉 기대작을 쓰고 있는 2015년 10월 31일 오늘. 엊그제부터 점점 추워지고 있지만, 아직까진 막걸리 한 잔에 추위도, 근심걱정도 털릴 정도. 버틸 만하다.”

 

 

<검은 사제들> - 11월 5일 개봉

 

돌발적인 행동 등으로 교단의 눈 밖에 난 김신부(김윤석)가 교통사고 이후 의문의 증상에 시달리는 소녀(박소담)을 치료하기 위한 예식을 준비한다. 한 명의 사제가 더 필요한 상황에서 신학생 최부제(강동원)가 김신부를 도우면서 동시에 감시하는 역할로 선택되고, 그들은 주어진 단 하루 동안 위험한 예식을 시작한다.

 

지극히 주관적인 관람 포인트)

 

1. 단편에서 장편으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검은 사제들>은 장재현 감독의 전작이자 단편영화 <12번째 보조사제>(2014)를 장편으로 재구성한 영화다. <12번째 보조사제>는 전주국제영화제, 미쟝센 단편영화제, 아시나국제단편영화제, 대구단편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에서 소개되었고, 또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12번째 보조사제>와 비교하면서 영화를 보는 것도 괜찮은 관람 포인트가 될 것이다. 좁게 봤을 땐, 같은 역을 맡았던 배우들을 비교하면서 결의 차이를 느낄 수 있고, 단편에서 표현되었던 세부적인 부분들이 장편에서 어떤 식으로 변주되는지를 유심히 살피는 것도 좋겠다. 더 나아가 같은 시나리오가 장편과 단편으로 연이어 영화화되는 경우가 드문 만큼, 장편 영화와 단편 영화를 본격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2. 엑소시즘

 

엑소시즘을 다룬 영화들은 많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드물었다. 기본적으로 엑소시즘 하면 떠오르는 것들은 사실상 <엑소시스트>(윌리엄 프리드킨, 1973)의 미쟝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신부, (웬만하면 2층) 가정집, 침대, 잠옷 등. 주로 서구적인 이미지들로 연상되는 엑소시즘을 <검은 사제들>은 이질감 없이 체화해냈을지도 관건이다.

 

 


<택시> - 11월 5일 개봉

 

이란 감독 자파르 파나히는 영화를 엄격히 규제하는 이란에서 20년간 영화연출이 금지되고, 해외출국도 금지된다. 그럼에도 그는 택시 기사로 분한 뒤, 택시 곳곳에 카메라를 숨겨 둔다. 택시운전을 하며 만나는 여러 사람들이 카메라에 담긴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파르 파나히는 영화를 찍는 걸 포기하지 않는다. <택시>는 그렇게 해서 탄생한 영화다.

 

지극히 주관적인 관람 포인트)

 

1. 이란과 이란

 

20년이라니. 길어도 너무 길다. 마치 우리나라의 7, 8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이란의 권위적인 검열이 우선 눈에 띤다. 자파르 파나히는 당시 얼마나 슬펐을까. 지아장커도 그랬듯, 자국에서 영화를 상영하지 못하는 현실은 비통하기 그지없으리라. 자연스레 내가 떠올린 이란은 유신정권의 폭압, 혹은 영화에 가해진 무자비한 ‘가위질’ 등의 서늘하고 숨 막히는 시대이자 공간이었다.

 

하지만 자파르 파나히의 이란, <택시>에서 드러나는 이란은 결코 어두운 그림자만이 드리워진 공간은 아닌 것 같다. 최악의 조건 속에서 이란에 대한 반감만으로도 영화를 가득 채울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는 오히려 멀찍이서 이란의 유쾌하고 따뜻한 민낯을 그대로 담는다. 그러니까 <택시>에는 두 개의 이란이 공존하는 셈이다. 드러나진 않지만, 무정한 이란와 카메라에 포착된, 따뜻한 이란. 모두 이란의 참모습일 것이다.

 

2. 자파르 파나히의 영화사랑

 

자파르 파나히가 이란에서 처한 상황을 들은 상태에서 <택시>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정확히 두 번 놀랐다. 우선, 도대체 이런 영화를 만드는 영화감독이 어떻게 ‘반체제 영화감독’이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리둥절함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우리나라를 생각해보면 그런 놀라움은 꽤 익숙하니까.

 

한 번 더 놀랐던 건 영화에 대한 감독의 절절한 사랑 때문이다. ‘영화 연출이 금지된 감독이 카메라를 들었다.’ 이 문장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뉘앙스를 품는다. 하지만 <택시>, 그리고 자파르 파나히에 대해서라면 정치적 논의는 힘을 잃는다. 그가 택시기사 역할을 하고, 카메라를 몰래 설치하면서까지 영화를 찍었던 건 정말 ‘순수하게’ 영화를 찍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정치적 보복이나 이란에 대한 반감이 드러나지 않는 점만 해도 그렇다. 그러니까 감독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찍은 건, 다른 이유보단 그렇게라도 영화를 찍지 않으면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 아닐까. 아마 그는 신열을 앓다 못해 신 내림을 받듯 카메라를 들고 택시에 올랐을 것이다. 영화적 방향성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서라도, 감독의 영화 사랑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영화 곳곳엔 애절한 사랑의 흔적들이 남아 있으리라.

 

 


<내부자들> - 11월 19일 개봉

 

대선을 앞두고 한 언론사의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은 유력 대통령 후보의 승리를 위한 뒷거래 판을 짠다. 그 와중에 판에 합류한 정치깡패 안상구(이병헌)는 이들의 비자금 파일로 거래를 준비하다 발각돼, 버려진다. 마침 매번 승진의 문턱에서 가로막히는 족보 없는 검사 우장훈(조승우)는 비자금 수사의 선봉에 서지만, 파일을 가로챈 안상구 때문에 우장훈은 좌천된다. 이강희, 안상구, 우장훈 이 세 인물들 사이의 ‘죽여야 사는’ 권력 전쟁이 <내부자들>의 골조를 이룬다.

 

지극히 주관적인 관람 포인트)

 

1. 사회 고발

 

줄거리만 봐도 <내부자들>은 대놓고 사회 이면의 치열한 권력쟁탈, 담합 등을 고발하는 영화다. 현실과의 놀라운 유사성에 진저리쳤던 <베테랑>(류승완, 2014)도 권력의 부조리를 낱낱이 파헤치는 고발영화였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권력은 없고 깡만 있는 서도철(황정민)이 권력의 밖에서 강한 펀치를 날리는 <베테랑>과는 달리 <내부자들>은 권력의 그늘 밑에서 벌어지는 진흙탕 싸움을 다룬다. 그러므로 차라리 <내부자들>은 <베테랑>보다는 <부당거래>(류승완, 2010)와 비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달리 말해 <내부자들>에서 <베테랑>과 같은 유쾌 통쾌 상쾌함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서도철의 강펀치는 최소한 두터운 권력의 벽에 균열이라도 가했지만, <부당거래>의 끔찍한 엔딩이 그렇듯 권력의 벽 내부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그 벽을 두껍게 할 따름이니까. 말하자면 <베테랑> 식의 영화와, <내부자들> 식의 영화는 각각 희망과 냉소의 편에서 현실 사회를 응시하는 셈이다. 어떤 방식이 옳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둘 다 필요한 작업임에는 틀림없다.

 

2. 웹툰과 영화의 거리

 

<내부자들>은 윤태호 작가가 2012년부터 연재하다 중단되었던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다. 근래 들어 이런 식으로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뛰어난 이야기구조뿐만 아니라, 소설 등과는 달리 구체적인 이미지가 잡혀 있기 때문에 비교적 영화화하기에 수월할 것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윤태호의 웹툰을 원작으로 영화화되었던 <이끼>(강우석, 2010)가 여러모로 아쉬웠듯이, 웹툰의 결과 영화의 결은 분명 다르다. 그러므로 <내부자들>에서 방점은 얼마나 원작에 충실했느냐보다는, 얼마나 영화의 결을 잘 살렸느냐에 찍혀야 한다. 김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화장>(임권택, 2014)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임권택이 ‘어떻게 하면 최대한 소설에서부터 멀어질 수 있을지’를 고민했던 것처럼. 만약 웹툰과 영화를 모두 보았다면. 둘의 유사성(특히, 이미지의 유사성만을 강조하는 건 참으로 덧없다) 보다는 차이점을 유심히 살펴보자. 그 과정에서 영화만의 가능성, 혹은 웹툰만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by 벼

 

*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