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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BIFF 2015

요새 공부는 하니?, 영화 <공부의 나라>

그동안 잊고 지냈다. 취업 준비생이라는 현재에 억눌려 과거의 기억은 무뎌졌다. 인간은 눈앞의 현실이 항상 더 중하고 긴급한 법이니까. 그런데 돌이켜보면 지금 내가 겪는 어려움이나 ‘그날’의 불쾌함은 본질적으로 같다. 영화를 보고 다시 ‘그날’이 생각났다. 수능 말이다.

 사실 나는 참 운이 좋은 케이스다. 수많은 정시생들과 달리 나는 수시 덕분에 대학에 왔다. 최저등급을 엉겁결에 맞췄고, 논술 시험 당일에 미리 써봤던 주제가 나와 나는 비교적 쉽게 대학생이 됐다. 재수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만큼 나는 공부가 싫었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지금, 현재도 나는 공부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 낯설지만은 않다. 영화 <공부의 나라> 말이다.

 

<공부의 나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부제는 ‘Reach for the SKY’다. sky가 아닌 SKY가 가리키는 것은 한국인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바로 그 대학들이다. 시점은 2014 수능에 맞춰져 있다. 사실 그래서 더 무섭다. 수능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학생, 재수생, 학부모, 학원 강사, 입시 컨설턴트, 종교인 등이 나온다. 의도적인 극적 장치 없이 그저 보여주는 것뿐인데도 영화에는 긴장감이 넘친다. 합격과 불합격의 갈림길에서 학생들은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실패자가 된다.

 

공부 = 좋은 대학 = 성공?

 

이 영화가 섬뜩한 이유는 사실 공부의 목적에 있다.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가? 이 질문을 직접적으로 던지지는 않지만 영화는 우리가 애써 외면하려는 답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들 대다수가 공부하는 이유는 사실 공부 자체에 있지 않다. 그것은 영화 속 재수생의 발언에서 엿볼 수 있다. “내가 가진 것들을 지키고 싶어요.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SKY가 아니면 그렇게 되기 힘들잖아요.”

 

서늘하면서도 명료한 답이다. 그러나 사실이 그러하다. 물론 요새는 좋은 대학 나와도 취업을 보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학력은 권력이다. 대부분의 경우 학력이 ‘나’를 규정하고, 삶을 이끈다. 냉정히 말해서 부모가 ‘공부 잘하는 자식’을 원하는 이유는 자녀를 좋은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좋은 대학에 가야 성공한다’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수험생들의 표정은 대체로 발랄한 편이다. 영화라 해서 더 어둡거나 더 무기력한 모습을 연출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아프게 다가온다. 그토록 밝은 아이들이 수능이라는 D-day가 다가올수록 초조해하고 손톱을 물어뜯는다. 수능일은 가혹하리만큼 잔인한 날이다. 어차피 10%만 성공하는 시험인데 모두가 잘 될 거라며 응원한다. 사실 이 응원은 기만에 가깝다.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수능 시험 당일 새벽부터 부모님들이 교회, 절, 성당으로 가는 모습을 보며 뭉클해졌다. 내가 시험장에서 긴장하며 시험을 치르고 있을 때 부모님들도 똑같은 마음이었겠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더 의아한 것이다. 수능은 수험생만 고생하는 시험이 아니다. 부모, 형제, 일가친척까지 마음 졸이게 만드는 이 숨 막히게 만드는 시험을, 우리는 왜 치러야만 하는 걸까?

 

수능 이후의 삶

 

수능 시험이 끝난 후 책들은 일시에 소각된다. 영화는 이 장면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수많은 교과서와 참고서적을 버리며 학생들은 스트레스를 푼다. 그렇다. 그들에게 책은, 공부는 억압된 스트레스일 뿐이다. 엄밀히 말해 그들에게 공부는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언젠가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고등학생까지는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도 성취도가 높았는데, 대학 입학 후에는 뚝 떨어졌다. 결과가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한국에서는 ‘대학만 가면 장땡이다.’

 

하지만 그건 일부 성공한 사람들만의 이야기다. SKY를 노렸지만 못 가게 된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그것은 재수 혹은 반수다. 1년이라는 시간과 부모의 금전적 지원, 정신적 스트레스를 감내하는 본인의 의지에 힘입어 다시 공부하는 것이다. D-day는 곧 D-364라는 숫자로 바뀌고, 입시학원의 입시설명회 앞의 숫자는 2014에서 2015로 변한다. 책장에서 사라진 책들은 곧 새 책으로 다시 대체된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봤던 영화들 중 이 영화가 유독 먹먹하고 답답했던 이유는, 아마도 대학에 잘 가도 결국 또 다시 공부해야만 하는 현실 때문일 것이다. 차라리 평생 공부해야 할 운명의 학자라면 억울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취직을 위해 또 다시 대학에서 배운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공부를 해야만 한다. 여기까지는 나의 이야기이고, 취직 후에는 또 어떤 공부가 기다릴지 알 수 없다. 승진시험을 위해 틈을 내 어학원에 다니는 직장인들의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 현재 일어나는 일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수능 날 축구를 했다. 부모님이 알면 경악할 일이었지만 나는 친구들과 분명 공을 찼다. 그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지키던 습관이었다. 점심 먹고 잠깐 짬을 내 공차는 것만큼 내게 기쁨을 주는 취미는 없었다. 수능 날도 어김없이 공을 들고 온 친구가 있었고, 우리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공을 찼다. 그렇다고 점심 이후에 치른 시험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도 않았다. ‘공부의 나라’에 살지만, 나는 학자가 아니다. 공부에만 빠져 살고 싶지는 않다. 취준생인 내가 지금도 축구를 계속 하는 이유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뒤에서 5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훌쩍이고 계셨다. 그분의 자제분이 수험생이라 그런지, 아니면 과거의 기억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언제까지 우리는 ‘공부의 나라’에 살아야만 할까? 공부가 밥 먹여주는 시절도 언젠가 지나갈 것이다.

 

by 락

 

*사진 출처: 다음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