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BIFF 2015

이야기의 힘, <세라자드의 꿈>

“천일야화의 시작과 끝이 어땠는지 아무도 모른다.” 영화 <세라자드의 꿈> 첫 장면에 나오는 내레이션이다. 그 말처럼 이야기, 아니 예술은 가능성을 전제로 존재한다. 말하고 듣는 이에 따라 이야기는 허무맹랑한 소리가 될 수도 있고, 현실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핵심 동력이 되기도 한다. <세라자드의 꿈>은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천일야화>를 메타포로 삼아 현재 이집트, 터키, 레바논 등에서 활동하는 현대의 세라자드들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여기서 잠깐, <천일야화>에 대해 소개해야겠다. 사실 필자 역시 천일야화가 천일 동안 이어진 이야기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천일야화의 ‘천일’은 1001을 뜻했다. 천일 하고도 하룻밤 더 밤에 들려준 이야기란 뜻이다. <아라비안 나이트>라고도 불린다. 우리에게는 친숙한 <신밧드의 모험>, <알라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등은 모두 <천일야화> 속 이야기다.

 

설화에 따르면 술탄 샤리아 왕은 왕비의 부정에 충격을 받고, 매일 처녀와 잠자리를 가진 후 다음날 어김없이 처녀의 목을 베었다. 그로 인해 이집트의 처녀들은 모두 집을 떠나 타지로 터전을 옮겼다. 수상의 딸이었던 세라자드는 비극을 멈추기 위해 자청해 술탄에게 시집간다. 그리고 죽음을 피하기 위해 1000일 하고도 하룻밤 더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설화, 죽음, 섹스 등이 얽히고 얽혀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그 때문에 술탄왕은 다음날 그녀의 목숨을 거두지 못한다.

 

현대에도 이어지는 이야기 DNA, 세라자드의 후예들 

 

영화는 <천일야화> 이야기와 맞물려 현대의 예술가들(터키 교향악단 지휘자, 레바논의 여배우, 이집트의 가수, 연극배우, 화가 등)이 등장한다. 그뿐 아니라 중간 중간에는 천일야화 관련 영화, 애니메이션이 등장하기도 하고, 피를 흘리는 군중들이 등장하는 터키 시위, 이집트 혁명 등이 교차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물론 영화 구성의 기본 뼈대를 이루는 건 교향악단의 <천일야화> 연주다. 총 4장으로 전개되는데 각 장마다 전체적인 템포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 영화 전반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음악 덕분에 영화는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았다. 감독의 의도였을지 모르겠지만 그 의도의 효과는 쏠쏠했다.

 

영화의 본 이야기는 터키, 레바논, 이집트로 대표되는 이슬람 문화권을 겨냥하고 있었다. 현대의 세라자드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을 행하고 있었다. “이야기에는 힘이 있어요” “이야기가 재미있는 이유는 그 안에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처럼 그들은 이야기의 가능성을 믿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신 전달하거나, 직접 전달하게끔 돕는 역할을 했다.

 

세라자드의 꿈이 현실이 되기 위해선

 

이집트 혁명 과정에서 아이를 잃은 부모를 만나 위로하는 예술가들의 모습에서 절절한 감정을 느꼈다. “이게 돈 문제냐, 정부에서 돈을 주면서 소송을 취하하라고 한다. 사람 목숨을 무슨 돈으로 해결하려 하냐”라는 어머니의 절규가 귓가를 뜨겁게 울린 이유는 우리나라의 현실도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중간 중간 묘사된 시위대의 모습 속은 울림을 주기도 했다. “우리가 없으면 정부도 없다. 그러니 우리보다 정부가 더 셀 수는 없는 법” “터키인을 위한 터키를 바란다” 등과 같은 단순한 구호들 말이다. 아주 단순한 말 속에 진리가 담겨 있었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목소리는 어떤 예술보다도 더 절실한 이야기였다”고 회고하는 예술가의 말처럼 그들이 이뤄낸 이집트 혁명은 우리나라 뉴스에도 ‘아랍의 봄’이라며 크게 보도될 정도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혁명 후’다. 무바라크 뒤를 이어 군부의 도움으로 대통령이 된 무르시 역시 기존의 독재자와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바로 ‘이야기(예술)는 과연 현실을 바꿀 수 있는가’이다. 감독의 답은 비교적 선명하다. 예술가들은 노래로, 춤으로, 연극으로, SNS로 이집트 시민들의 행동을 이끌어낸다. 물론 예술이 현실을 바꾸는 데 있어 직접적으로 작용한다고 보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술가들의 태도다. 그들은 희생자 가족을 만나고, 비극을 애도하는 자리를 피하지 않는다.

 

내게는 매우 어려운 영화였지만 적어도 한 가지 주제는 읽어낼 수 있었다.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본질은 현실을 바꾸는 데 있다. 비록 그것이 허구일지라도 이야기에는 힘이 있다. 그리고 허구는 현실을 바꿀 수 있다. 원작인 <천일야화>의 끝은 한 가지로 정의되지 않는다. 버전에 따라 결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다 들을 때쯤, 술탄은 죄를 뉘우치고 세라자드와 평화롭게 살았다는 결말이 보편적이지만, 술탄은 세라자드에게 살해된다는 결말도 있고, 이야기를 다 들은 술탄 왕이 부끄러움에 먼 길을 떠났다는 결말도 있다.

<세라자드의 꿈>이 던지는 화두는 ‘이야기의 힘’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천일야화>처럼 아무도 모른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생각해 봐야할 문제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