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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투 라이프>에 대한 세 가지 키워드

이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유대인 관련 영화라면 이제 사절이다. 50년이나 지난 과거의 일이기 때문이 아니다. 햇수는 전혀 중요치 않다. 2014년 4월에 발생한 사건을 나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테니까.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끊임없이 자각하고 반성해야 하는 일은 분명히 존재한다. 유대인 학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동시에 근래 들어 중동의 상황을 살펴보면, 혹시 유대인 학살이 유대인들에게 일종의 절대적인 ‘면죄부’로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분명 부당하고 끔찍한 폭력을 경험했지만, 그렇다고 지금 그들이 행하는 부당한 처사들이 용인되는 건 아니다.

 

만약 <투 라이프>가 유대인 학살에 관한 영화라는 걸 미리 알았다면,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그걸 몰랐던 나는 영화를 봤다. ‘다행히’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투 라이프>는 비록 아우슈비츠를 다루는 영화였지만, 기존의 관습에 파묻혀있지 않았다. 영화는 새로운 방식으로 유대인 학살을 증언하고 있었다. 그리고 증언의 대상은 유대인 학살이라는 과거의 사건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현재의 개인이었다.

 

1. 트라우마가 회귀하는 방식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세 명의 여성, 엘렌(줄리 드빠르디유 분), 릴리(조한나 터 스티지 분), 로즈(수잔 클레망 분)은 15년만에 재회한다. 이 세 여성이 바닷가에서 회포를 푸는 것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재밌는 것은, 혹은 이 영화만의 성격이라 할 만한 것은 유대인 학살을 다룬 영화 치고 분위기가 상당히 가볍다는 점이다. 그녀들 사이에서의 가벼운 대화나, 우스꽝스러운 모습도 그렇지만 특히 배경 음악으로 깔리는 왈츠 풍 음악은 그래도 되나 싶지만 경쾌했다.

 

물론 그녀들은 마냥 행복하지는 않다. 간헐적이지만 과거의 끔찍한 기억들을 계속해서 회상하고, 죽은 딸에 대한 죄책감에 울기도 한다. 끔찍한 과거를 뒤로한 채, 그녀들은 ‘지금’ 행복한 걸까, 불행한 걸까. 영화를 보는 내내 품은 의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행복 혹은 불행 중 어느 하나의 감정을 취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다소 우스꽝스럽게 틱틱대는 로즈의 행동은 장난이라기엔 무거우나, 그녀가 토하듯 과거를 끄집어내고 엉엉 울어버렸던 식사 자리는 어딘지 모르게 가볍다.

 

그녀들의 감정은 결코 행복 혹은 불행이라는 감정으로 표현할 수 없다. 지독히도 잔인했던 과거와 달리 그녀들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으니까. 과거는 끔찍한 트라우마로 남아있으나, 어디까지나 그녀들은 삶으로(투 라이프) 돌아왔으니까. 그녀들 모두의 이중적인 위치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그녀들은 생을 되찾은 현재가 행복하나, 언제든지 과거의 트라우마는 회귀한다. 둘 중 어느 하나에 안주하지 못하며 그들은 끊임없이 불행과 행복을 넘나든다.

 

트라우마는 이런 식으로 회귀한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그 존재 자체로 현재를 압도하는 것은 아니다. 슬퍼도 살아가는 게 인간이고, 슬프니까 살아가는 게 인간이다. 하지만 간헐적으로, 혹은 은연중에 트라우마는 현재로 침범한다. 바캉스를 즐기는 세 여성들을 담은 쇼트 사이사이로 생뚱맞게 삽입되는 무거운 씬들. 혹은 화음을 넣고,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깔깔거리며 부르지만, 서슬 퍼런 아우슈비츠의 잔해가 남아 있는 노래들. 그녀들에게 어쩌면 현재의 일상 자체는 트라우마의 연장선상에 있다. 트라우마가 현재인가, 현재가 트라우마인가. 그 경계는 오묘하다.

 

아우슈비츠 시퀀스는 처음에 잠깐 등장한다. 5~10분 정도? 하지만 그 짧은 시퀀스는 이후 모든 시퀀스를 압도하는 어떤 위치를 선점해버린다. 이후 해변가에서 아무리 그녀들이 행복한 웃음을 짓고, 물놀이를 한다고 할지라도 첫 번째 시퀀스의 잔상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로써 관객은 어느 정도 세 여자의 트라우마를 공유하는 셈이다. 혹은, 어쩌면 관객은 아우슈비츠의 트라우마를 간접적으로나마 공유하게 된다. 물론 그건 연민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2. 엘렌 그리고 불륜

 

아우슈비츠를 다룬 첫 번째 시퀀스 이후 엘렌의 편력이 이어진다. 영화는 친절하게 엘렌이 아우슈비츠 이후 살아남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은 엘렌을 클로즈업한 쇼트다. (실제 영상은 논외로 하고) 말하자면, <투 라이프>는 세 여성의 재회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그 전반부와 후반부에는 엘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셈이다. 왜 굳이 엘렌이어야 했을까.

 

그 이유는 충분하다. 엘렌의 편력은 흥미롭기 때문이다. 엘렌은 아우슈비츠 이전부터 흠모해오던 앙리(이뽈리뜨 지라르도 분)과 결혼했다. 하지만 그는 아우슈비츠 이후로 성기능을 상실한 상태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만 성적인 불만족으로 가득했다. 그러던 그녀에게, 친구들과 재회했던 해변에서 ‘어린’ 피에르가 접근한다. 엘렌은 앙리에게 느꼈던 성적 불만족을 피에르를 통해 해소한다. 이 자체로도 흥미롭다. 어쩌면, 엘렌은 다른 이들에 비해 ‘흥미로운’ 소재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위에서 살폈듯, 불륜은 영화의 중심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가 막장이라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투 라이프>는 유대인 학살에 관한 영화다. 그러므로 내가 영화의 중심이라고 했던 불륜은 단순한 막장적 설정보다 무거운 의미를 지닌다.

엘렌은 과거 아우슈비츠의 트라우마 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벗어나고자 한다. 그런데 앙리의 존재는 그야말로 아우슈비츠 그 자체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아내와 자식을 잃었고, 거세당했다. 그와 엘렌의 결혼은 여러모로 아우슈비츠와 접한다. 엘렌은 앙리가 아우슈비츠에서 잃은 아내의 빈자리를 채워 들어갔고, 아우슈비츠에서 상실한 섹스는 엘렌의 결혼생활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때 피에르가 등장한다. 그는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아우슈비츠와는 상관이 없다. 심지어 결핵으로 징병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어린 그에게 전쟁은 요원하다. 엘렌에게 피에르는 아우슈비츠 외부의 존재다. 그는 미혼이며(거기다 동정이며), 성적으로도 충만하다. 결국 엘렌이 피에르에게 끌리는 것은 비유적으로 아우슈비츠라는 과거의 외부를 향한 욕망이라고 읽을 수 있다.

 

3. 그러나, 그대, 그것은 꿈, 꿈의 이야기

 

하지만 결국 엘렌은 다시 앙리에게 돌아간다. 그녀는 다시금 아우슈비츠의 고통 속으로 향한다. 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고통을 피하지 않겠다는 의지인가. 혹은 과거를 잊기에 그녀의 트라우마는 너무나도 컸던 것일까. 어떤 해석이든 가능하리라. 하지만 마지막 쇼트에서 차창 너머로 담배를 피는 엘렌의 표정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릴리, 로즈와 함께했던 짧은 바캉스는 끝났고, 더 이상 피에르를 볼 일도, 그와 섹스를 할 일도 없다. 다만 남은 것은 앙리와의 지리멸렬하고 섹스-없는 결혼 생활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표정은 영화를 통틀어 가장 행복하고 만족스럽다.

 

이러한 낭만적인 치장은 영화의 완결적 구조를 위한 기만술이지 싶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녀는 정말로 행복했을까. 아니면, 일상으로 돌아‘간’ 그녀는 앙리와 행복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아우슈비츠로서 존재하는 앙리 곁에서 그녀는 평생 아우슈비츠의 늪을 허우적거리지 않을까?

 

여기서 재밌는 장면. 엘렌이 차창 밖으로 담배를 피는 쇼트 이후. 진정 영화의 마지막 쇼트는 30년 뒤, 세 여자가 다시 모인 장면이다. 이 장면은 실제 주인공들의 모습을 담는다. 여전히 세 여성은 행복해하며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그 사이의 시간, 30년이라는 시간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그 사이에 엘렌은, 릴리는, 로즈는 어떤 삶을 보냈을까.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녀들이 다시 모여 부르는 노래는 그 끔찍한 아우슈비츠의 멜로디다.


*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