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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삐딱하게 영화보기

<자유의 언덕> 시간과 인과의 전복적 배치란

“시간은 우리 몸이나 이 탁자 같은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 뇌가 과거, 현재, 미래란 시간의 틀을 만들어내는 거죠. 하지만 우리가 꼭 그런 틀을 통해 삶을 경험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선(문소리 분)과 마주한 모리(카세 료 분)의 말이다. 그리고 <자유의 언덕>은 정말로 시간에 대하여,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제시한다.

영화는 크게 두 부분의 시점으로 나뉘어 있다. 우선, 모리가 영선을 찾으러 한국에 온 이후로 영선이 모리의 편지를 보기 전까지의 시간. 이걸 ‘A시간’이라 부르기로 하자. 또한, 영선이 모리의 편지를 접한 이후의 시간. 이건 ‘B시간’이라 이름 붙여보겠다. 영화는 A시간과 B시간을 교차 편집해 보여준다. 그리고 A시간이 보이는 방식은, B시간에서 영선이 읽는 편지와 이어진다. 말하자면, A시간은 B의 시간에 구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전개의 대다수를 이루는 B시간 와중에 간헐적으로 A시간이 삽입된다. B시간의 쇼트들은 (앞과 뒤 일부를 제외하면) 영선이 편지를 읽는, 정확히는 편지를 넘기는 모습을 짧게 담는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상 B시간은 A시간을 구분 짓는, 막(幕) 혹은 챕터의 역할을 한다.

 

 

B시간으로 인해 A시간은 조각난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영선이 편지를 읽기 전까지의 모리의 시간은 편지 속에 담김으로써(궁극적으로는 그걸 영선이 읽음으로써) 사후적으로 재구성된다. 비로소 A시간은 ‘기록’(혹은 역사)가 된다. 모리의 말을 적용해 보자. B시간 이전까지 A시간은 인간의 ‘틀’을 벗어나 있었다. 말하자면, 거기에 ‘과거-현재-미래’라는 구분은 없었다. 시간은 알아서 (이런 표현이 어떨 진 모르겠지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열두 장의(사실은 열 세장인데, 이는 나중에 얘기하겠다.) 편지를 통해 A시간이 분절되는 순간, A시간은 정확히 열두 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구성된다. B시간으로 인해 비로소 A시간은 인과관계를 갖는 열 두 개의 시간들로 구성된 하나의 기록이 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녹록지 않다. B시간의 역할은 이중적이다. 영선은 계단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만 편지들을 놓쳐버린다. 그리고 임의적으로 떨어진 편지들을 하나하나 줍는다. 이후 그녀는 카페에 앉아 ‘임의적’으로 뒤섞인 편지들을 하나하나 읽는다. 그렇게 편리하게 분절됐던 A시간은 뒤죽박죽 섞인다. 위에서 말했듯, A시간은 B시간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A시간은 B시간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B시간에 뒤섞인 편지들과 맞물려, A시간의 순서가 엇갈린다. 모리가 상원(김의성 분)과 술자리를 갖는 씬 이후 모리와 상원이 처음 인사를 나누는 씬이 나온다. 모리와 영선은 섹스를 한 뒤, 각방(정확히는 방과 의자)을 쓴다. 이런 식으로 뒤섞인 A시간에서 과거는 미래이고, 미래는 과거이며, 현재는 또 과거가 되었다가, 과거는 또 현재가 된다.

 

여기서 영화는 한 발 더 나간다. B시간마저 뒤섞고, 더 나아가 A시간과 B시간의 관계마저 뒤집어엎는다. 문제는 열세 번째 편지다. 다시 영선이 편지를 놓치는 씬으로 돌아가 보자. 영선이 편지를 줍는 쇼트 몇 개를 이은 뒤, 영화는 덩그러니 놓여있는 편지 하나를 줌인하며 보여준다. 바로 다음 쇼트에서 영선은 카페로 들어간다. 결국, 그 하나의 편지는 잃어버린 셈이다. 하지만 관객에게 그 열세 번째 편지는 잊히기 쉽다. 스치듯 지나가는 단 하나의 쇼트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 쇼트를 기억한다고 할지라도, A시간은 B시간에 의해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B시간이 순순히 진행되는 이상, 아쉽지만, 열세 번째 편지는 영영 사라질 것이었다. 그렇게 예상할 수밖에 없다. 영선을 좇는 B시간에서 그녀의 손에서 떠난 열세 번째 편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심지어 그녀는 열세 번째 편지 자체를 모르는 것 같다.), 그렇다면 B시간에서 잃어버린 열세 번째 편지의 시간이 재구성되는 일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영화는 보란 듯이 열세 번째 편지를 ‘되’찾는다. 열세 번째 편지는 영화의 마지막 씬이다. 이건 영화 자체의 인과를 부정하는 행위며, 영화 자체의 시간을 거스르는 행위다. 말하자면, A시간의 뒤섞임은 ‘쓰러짐으로 인한 편지의 뒤섞임’이라는 영화 속 복선으로 설명이 되지만, B시간의 뒤섞임에 대한 설명은 영화 속에서 찾을 수 없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지금까지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던 이름) 홍상수라는 영화 외적인 존재가 불가피하다. 영선이 잃어버린 편지는 결국 홍상수가 영화 밖으로 끄집어낸다. 이 말은 곧, 관객들은 필연적으로 이 영화를 두 번 보게 된다는 말과 같다. 한 번은 영선의 시선에서, 다른 한 번은 홍상수의 시선에서. 그리고 (당신이 이 영화를 두 번 본 게 아니라면) 이 두 시간은 동시에 진행된다. 정확히는 마지막 씬의 시작점에서부터 관객은 잊힌 열세 번째 편지를 보는 것과 동시에 영선이 편지를 잃어버린 씬 이후의 영화를 (홍상수의, 그러니까 전지적 시선으로) 다시 본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B의 시간마저 가만두지 않는다.

 

마지막 씬은 모리가 잠에서 깨는 것(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이러한 씬을 ‘잠씬’으로 표기하겠다)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유사한 잠씬이 앞에 있었다. 그 잠씬도 모리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부터 시작했다. 바로 앞의 씬은 모리의 꿈이었다. 몽롱하게 울리는 영선의 목소리는 그것이 꿈임을 보증했다. 하지만 두 번째 잠씬의 앞 씬은 꿈이 아니다. 그 씬은 오히려 B시간이다. 둘은 전혀 다른 시간인 것이다. 여기서 두 잠씬의 관계는 의미심장하다. 이미 첫 잠씬과 바로 직전의 꿈씬을 경험했던 관객은 경험적으로, 두 번째 잠씬도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두 번째 잠씬 바로 직전의 씬도 ‘꿈’이었던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비록 이 의문이 오래가진 않더라도, 일정부분 A시간과 B시간은 모호하게 겹친다. 더구나 거기서 B시간은 A시간의 과거로서 존재한다. 꿈의 시간은 잠에서 깨기 이전이니까. 여기서 A시간과 B시간의 선후관계는 뒤집어진다.

 

이런 식으로 <자유의 언덕>은 기록을 구성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과관계 혹은 시간의) 해체가 앞선다. 그야말로 ‘탈구축(deconstruction)’이다. 탈구축의 진정한 의미는 있는 것을 마구잡이로 부수는 것이 아니라, 해체와 구축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다. 의미는 해체되지만, 동시에 새로운 구축을 통해 전혀 다른, 전복적인 의미를 양산해낸다. 당연히 ‘탈구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운동이므로, 해체와 구축은 끊임없이, 하지만 다르게 반복된다.

 

영화에서 ‘편리하게’ 분할된 파편적 시간들은 왜곡된, 그리고 인과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편집된다. 편리함이 불편함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인간의 틀 속에 들어온 시간이 인간의 논리를 거부한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인간적’ 시간을 시간은 거부한다. 이건 생각보다 훨씬 전복적이다. 인간의 틀 밖에서 자적(自適)하는 시간과, 인간의 틀 속에 들어와서 흔들리는 시간. 전자가 무관심(혹은 무의식)이면, 후자는 충돌이자 전복이다. 무작위한 시간에 비해 인간의 틀은 완고하므로 취약하다. 태풍이 부는 들판 위 나무와 갈대의 이야기를 생각해보길. 그렇다면, 시간과 인간 중 무너지고 부서질 수밖에 없는 것은 어느 쪽인가.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