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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해피 해피 와이너리>에 대한 두 가지 키워드

좋은 기회로 <해피해피 와이너리>(이후 <와이너리>) 시사회를 보고 왔다. 여성 감독 미시마 유키코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그의 전작이자 <와이너리>의 전편이라고 할만한 <해피해피 브레드>도 보지 못했다. 말하자면 나는 아무런 기대 없이 영화를 보러 갔던 셈이다.

 

직전에 <버드맨>(알레한드로 곤잘레즈 이냐리투, 2014)에 대한 글(‘<버드맨> 알레한드로 곤잘레즈 이냐리투만의 '연극적 롱테이크'’)에서, 나는 ‘기대가 높을수록 실망할 여지가 많다’라는 경험적 확신이 보란 듯이 깨졌다고 밝혔다. 그리고 정 반대의 측면에서, <와이너리>도 지금껏 축적된 경험이 결코 보편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방증해주었다. 그러니까, <와이너리>를 나는 아무런 기대 없이 봤지만, 영화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생각보다 별로였다. 하지만 실망했다는 표현은 쓰고 싶지 않다. 기대 자체가 없었으니까.(기대와 실망의 관계에 대해선, ‘지극히 주관적인 1월의 기대작 세 편’에서 쓴 바 있다.)

 

현재 우리나라 영화 시장에서 다양성 영화(혹은 저(低)자본 영화)가 설 자리가 없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최근엔 ‘을’의 위치에 있는 영화들끼리의 싸움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마냥 ‘별로’인 영화를 좋다고 할 순 없다. 사실상 그것은 돈이 많이 투자된(즉 강력한 제작사의), 관객들이 많이 본 영화들을 (어떤 이유에서건) 마냥 좋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영화는 영화니깐. <와이너리>에 대한 나의 감상은 다소 역설적이다. 일단 <와이너리>는 식상하고 뻔했지만, 또한 (나쁜 의미에서) 난해하고 모호했다.

 

1. 식상함

 

투박하게 나눠보면, <와이너리>의 식상함은 영화의 구조적 문제이고, 모호함은 영화의 언표행위 혹은 이미지의 문제다. 말하자면, 식상함과 모호함은 다른 층위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역설’의 정의가 그러하듯, 얼핏 보기와는 달리 여기서 제시한 <와이너리>의 두 특성은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

 

표면적으로 접근해 봤을 때, 식상함의 중심에는 ‘가족’이라는 코드가 있다. 아주 단순화하면 <와이너리>는 상처받은 남자 아오(오오이즈미 요 분)와 상처받은 여자 에리카(안도 유코 분)의 얘기다.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이 두 인물은 상처를 공유하고 서로를 ‘힐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야말로 요새(혹은 최근에) 밥 먹듯 들리는 ‘힐링’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우연히도(그리고 이러한 우연은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아오와 에리카의 상처는 크게 다르지 않다. 만약 둘의 상처가 전혀 달라서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면, 둘의 화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두 인물이 허우적대는 상처의 근원에는 (비정상적) 가족에 대한 기억이 있다. 물론 아오에게는 개인적인 차원의 시련이 있었지만, 그전에 아버지와의 불화가 있었다. 또한, 영화 처음에 드러나는 아오의 가족은 비정상적이다. 즉, 정상적이지 않다. 아오의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오로지 아오와 띠동갑 동생 로쿠(소메타니 쇼타 분)뿐이다. 그마저도 둘의 대화는 없거나, 가볍다. 거기다 (아마 영화를 통틀어 가장, 아니 유일하게 강렬한) 첫 번째 씬을 기억해보자. 아오는 자신을 도끼로 내려찍으려 말고 어떤 나무를 향한다. 그리고 아리송한 표정으로 나무에 매달린 포도(그러니까 그 나무는 포도나무였다.)를 먹는다. 아마 관객들에게 쉽사리 잊힐지 모르나,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하지는 이 씬은 이후 전개되는 영화의 분위기와는 전혀, 그리고 유일하게 어긋나는 점이나, 영화 전반을 가로지른다는 점을 고려하면 영화의 중심에 있다. 그리고 이 씬은 바로 아버지와 아오의 비뚤린 관계를 상징한다.

 

에리카는 말할 것도 없다. 그녀의 모든 이해할 수 없는 행위의 근원도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다. 스포일러에 대한 염려 때문에 말할 순 없지만, 여하튼 그녀의 가족은 ‘막장’이고 ‘난장판’이다. 이렇게 비정상적 가족의 기억과 그로 인한 상처로 무장한 아오와 에리카, 두 사람이 만났다. 좀처럼 풀리지 않을 것만 같던 둘의 갈등 관계는, 에리카의 애상적인 표정 하나만으로 소통으로 이어진다. 아마 아오는 에리카의 표정에서 자신의 표정을 짐작했던 게 아니었을까. 이후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지는데, 결국 폭발하듯 끌어안고 키스를 나누는 씬으로 영화는 끝난다. 

 

결국, 둘은 하나 되어 끝난다. 영화는 결혼까지 보여주진 않지만, 이웃의 결혼식에서 에리카가 부케를 건네받는 쇼트 이후 아오와 에리카를 담은 쇼트가 연결된 것에서 둘의 결혼을 추측해볼 수 있다. 다시 ‘가족’이라는 코드로 돌아가 보자. 이것저것 많은 얘기를 하고 있는 영화는 생각보다 단순한 구조로 이뤄져 있다. 도식적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비정상의 징후를 보이는 가족 -> 해체된(상실된) 가족 -> 되찾은 (다른) 가족. <와이너리>는 이런 식상한 구조로 되어있다. 이러한 도식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내러티브는 수없이 많다. 편부모, 고아 등 비정상적인 가족 형태에서 방황하고 고통받는 자아(대부분 여성)는 늘 새로운 (더구나 평생 그 남자/여자와 함께한다면 안정적일!) 가정을 꾸리면서 행복해하거나, 심지어는 비로소 자아를 찾는다. 물론, 문제는 그러한 내러티브는 모두 여기서 끝난다는 것이다. <와이너리>도 마찬가지다.

 

<와이너리>의 식상함을 좀 더 심층적으로 파고들어가 보자. 위에서 살핀 <와이너리>의 구조는 고전적 영화의 구조와 일치한다. 특히 고전 할리우드 영화에는 ‘삼각 구조’라는 법칙이 있었다. ‘삼각 구조’란 ‘질서/무질서/질서의 회복’의 순서를 말한다. 즉, 당시 헐리우드 영화들은 대부분 ‘삼각 구조’에 기반을 뒀으며, 영화의 특수성 혹은 개별성은 부차적인 요소들(서스펜스, 스타, 이미지 등)에 의존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여전히 헐리우드뿐만 아니라 (특히 대중적인 흥행을 지향하는) 영화들 전반에 남아있다. 헤겔의 변증법적 체계(정-반-합)가 견고하고 안전하게 자리하는 것처럼, ‘삼각 구조’는 관객들에게 내러티브의 탄탄함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와이너리>의 식상함은, 영화산업의 현상 자체와 맞닿아 있다.   
 
2. 모호함

 

구조와 전개가 뻔하다고 영화 자체가 식상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영화에서 명료한 것은 구조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삼각 구조’ 말고 어느 하나 명쾌하게 다가오는 것이 없었다. 짐작건대, 그건 영화 전반에 배치된, 아니 영화 자체라고 해도 좋을 상징적 언표행위 때문이었다.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하여 상징이라는 개념부터 명확히 해보자.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다. 상징은 특정 집단에서 공유된 일종의 약호다. 그런데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으로 기능하게 되는 순간, 비둘기는 텅 빈 기호가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영화에서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으로 등장시켰다고 쳐보자. 영화는, 관객이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비둘기의 상징성을 이용한다. 거기서 비둘기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비둘기는 비둘기여서가 아니라, 평화를 상징하는 기호이기 때문에 영화 속으로 불려 들어왔을 뿐이다. 문제는 - 이게 중요한데 - 관객이 그 상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다. 그러한 관객에게 비둘기는 왜 있는지 모르는 하나의 이미지일 뿐이다.

 

영화는 그 자체가 상징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수많은 상징적 장치들로 구성되어있다. 우선, 상징적 소재들이 있다. 와인, 암모나이트, 꽃(에리카), 하모니카, 실로폰 등. 그리고 상징적 이미지도 있다. <와이너리>에서는 중간에 내러티브와 상관없이 자연물(특히 포도밭, 하늘 등)의 이미지를 편집해 넣었다. 오즈 야스지로가 즐겨 썼던 기법의 하나로 베개 샷(pillow shot)이란 게 있다. 그의 영화 <만춘>(1949)에서 내러티브가 전개되다가 돌연 꽃병을 비추는 쇼트가 나온다. 이런 식으로 생뚱맞게 제시되는 쇼트를 베개 샷이라고 한다. 하지만 별다른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미지가 중간에 삽입되더라도, (정확히는 이미지 때문이 아니라 편집된 그 위치 때문에) 그 이미지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상징적인 쇼트들도 있다. 사실상 내게 로쿠가 단독으로 나오는 모든 쇼트는 상징적이었다. 심지어는 대화들, 언어들도 상징적이다. 집안이 너무 고요해서 실로폰을 치기 시작했다는 로쿠, 에리카의 편지, 엄마에게 돈을 빌리러 왔다고 말하는 에리카, <와이너리>의 영어 제목이기도 한 ‘포도 덩굴의 눈물(a drop of the grapevine)’, 아오의 최종 목표인 ‘흙의 맛’.

 

<와이너리>는 상징들의 향연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문제는 상징 관계를 공유하지 못하는 관객이 있다는 데 있다. 이건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국가적인, 혹은 민족적인 차이의 문제일 수도 있다. 최소한 나는, 그리고 나와 같이 영화를 본 친구는 영화에서 끊임없이 던져지는 상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위에서 짚었듯, 내게 <와이너리>는 상징성을 잃은 텅 빈 기호들만의 향연이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심한 비유를 하면, <와이너리>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두 시간 동안 최소한의 내레이션이 깔린 채 아마존 이곳저곳을 보여주는 프로그램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정처 없이 눈앞에 펼쳐지는 기호들을 좇았다. 하지만 결국 기호들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단지 자기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 말고는.

 

*마찬가지로 텅 빈 기호들로 구성된 영화 중에 <꿈보다 해몽>(이광국, 2015)이 있다. <와이너리>가 그렇듯,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물들이 여러 번 등장한다. 하지만 이전에 썼듯이(‘<꿈보다 해몽> 텅 빈 기호들만의 모호한 향연’), 이 영화의 모호함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영화는 애초에 꿈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와이너리>는 꿈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전자의 모호함에서 몽롱한 듯 편안함을 느꼈다면, 후자의 모호함에선 또렷하고 날 선 불쾌함만을 느꼈다.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