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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킹스맨>에 대한 세 가지 키워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조악한 포스터와 가볍고 우스꽝스러운 예고편을 봤을 때만 해도 한 편의 코믹물인 줄만 알았다. <킹스맨> 얘기다. 하지만 막상 열어본 영화는 생각보다 진지했고, 또 복잡했다.

개봉한 지 이 주도 넘은 이 시점에, 새로운 영화를 소개하는 코너에 <킹스맨>을 올리는 까닭이다. 애초에 나는 머리 식힐 겸, 킬링타임용 정도로 <킹스맨>를 보러 갔음을 시인해야겠다. 정신없이 싸우고, 정신없이 웃긴 영화 정도로만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난 뒤 풀리지 않은 궁금증들이 머리를 맴돌았고, 하고 싶은 말들은 또 너무 많았다. 이 영화를 ‘아 그 영화. 얼마 전에 봤었지. 근데, 무슨 내용이더라.’ 정도로 회상한다면 굉장히 안타까울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을 정리할 겸 글을 남긴다.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영상, 오마주와 패러디, 그리고 패기.

 

1. 영상 – 만화적 상상력과 박진감(핍진성) 사이

 

다들 아시다시피 <킹스맨>은 첩보 영화다. 그리고 첩보 영화의 중심이 액션씬이라는 의견에 이의를 다실 분은 거의 없으리라 본다. 액션이 서투르거나, 카메라가 부자연스럽거나, 소리가 미약하다면 해당 액션씬은 물론이거니와, 그 영화 전체가 졸작이 될 수 있다. 졸렬한 액션씬을 담은 <007>을 상상해보시라. 끔찍하지 않은가.

 

다행히, 아니 정말로 <킹스맨>의 액션씬은 탁월했다. 이미 널리 회자되고 있는 교회에서의 롱테이크 액션씬, 마지막 에그시(태론 에거튼 분)와 가젤(소피아 부텔라 분)의 혈투 등. 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액션은 첩보물에 대한 가지고 있었던 나의 기대를 충족시켰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액션을 맛볼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은 <레이드 2>(가렛 에반스, 2014) 이후로 처음이었다. <레이드 2>의 액션씬은 그동안 봐온 액션물들에서 느끼지 못했던 신체의 물질성(풀어 말하면, 그저 영상을 보는 것일 뿐인데 ‘내가 다 아픈’ 느낌이랄까), 그리고 그 차원에서의 ‘색다른’ 박진감을 무지막지하게 선사했다. <킹스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새로움의 의미는 <레이드2>와는 다소 달랐다.

 

<킹스맨>의 액션씬의 특징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속도와 클로즈업이라고 말할 것이다. 액션씬에서 속도는 늘 느려짐과 빨라짐 사이를 물 흐르듯 왕복했다. 그 와중에 당하는 인물의 표정, 신체는 느린 시간 속에서 두드러졌다. 거기다, 잘린 손, 반 토막 난 신체, 칼에 찔린 얼굴 등의 클로즈업이 동시에 이뤄졌다. 이렇게, 속도 조절과 클로즈업 샷의 중첩은 결정적으로 ‘만화적 효과’를 낳았다. 여기서 ‘만화적 효과’란, 박진감의 반대 개념으로 쓰였다. 즉, 눈앞에서 펼쳐지는 영상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영화는 만화일 수는 없다. (만화와는 달리) 영화는 애초에 실재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관객은 영화를 ‘현실’로서 인식하려 한다. 영화에 있어서 관객의 인식은 현실을 지향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만화적 효과’마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생각보다 간단하다. 비현실적 장치들을 도입하면 된다. 그러니까 <킹스맨>에서 속도 조절과 클로즈업 샷은 비현실적인 장치의 하나인 셈이다. 둘 중 하나만 있었다면 ‘만화적 효과’를 내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예컨대 그저 칼에 찔리는 장면만 있었다면 그건 차라리 끔찍한 현실로 다가왔을지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 슬로모션을 거는 순간 그 쇼트는 표현의 과잉(혹은 낯섦)으로 넘쳐나고, 그로 인해 (영화)관객의 현실 지향적 인식도 정지된다. 같은 끔찍함일지라도, 전자와 후자는 다른 것이다.

 

달리 말하면, <킹스맨>에서는 <레이드2>에서와 같은 신체의 물질성은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마냥 만화적 상상력에만 의존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를테면 맞아도 표정 하나 꿈쩍 안 한다든지, 토막 난 상태로 걸어 다닌다든지 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액션이나 표정, 카메라 워크(특히 교회 씬은 경이로웠다), 그리고 진부하지만 긴장감을 쥐락펴락하는 (뻔한) 음악을 통해 나름의 박진감도 놓치지 않았다.

 

2. 오마주와 패러디 사이에서 영화를 묻다

 

<킹스맨>은 분명 앞선 첩보물들-특히 <007> 시리즈-에 대한 오마주다. 깔끔한 정장, 매너를 갖춘 ‘젠틀맨’의 이미지, 그리고 다양하고 실생활과 접목된(우산이나 구두, 정장 등) 최첨단 무기들. 이러한 도상 혹은 지시대상(referents)은 <007> 시리즈 그 자체다.

 

하지만 <킹스맨>은 <007>을 좀 색다르게, 개성적으로 전유한다. 대부분 우스꽝스러운 장면들이 그렇다. 예컨대 (에그시는 부인하지만) 제임스 본드의 약자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개 이름 ‘JB’가 그렇다. 또한, 마지막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구식 무기도 그렇다. 최첨단 장비들로 가득한 줄만 알았는데, 인공위성에 결정적인 공격을 하는 무기는 웬 풍선에 의지하고 있다. 대기권 위에 아슬아슬 떠 있는 록시(소피 쿡슨 분)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울 뿐이었다. 결정적으로 발렌타인(사무엘 L. 잭슨)의 소굴에서 벌이는 마지막 총격 씬은 앞선 액션씬들과 비교했을 땐 상당히 의외였다. 박진감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앞선 액션씬들의 연장선상에서, 이 씬은 “도대체 왜 한치 앞에서 총질을 당하는 에그시는 한 발도 맞지 않는 거지?”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007>과 분명히 갈리는 지점이다. 이는 감독의 실수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패러디적 요소를 염두에 둔다면 이 씬은 차라리 제임스 본드라는 불사의 존재를 패러디한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식으로 <킹스맨>는 오마주와 패러디 사이에 있다. 하지만 패러디든 오마주든 분명한 건, <킹스맨>이 <007>, 더 나아가 첩보물에 ‘대한’ 영화라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는 궁극적으로는 영화에 대한 영화로서 자리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관객에게 영화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영화에서 정확히 두 번 반복되지만, 뜬금없기도 하고 당최 이해하기 어려운 대사가 있다. “현실은 영화가 아니니까.” 한 번은 발렌타인이 해리(콜린 퍼스 분)에게, 한 번은 에그시가 발렌타인에게 던진다. 문제는 이 대사가 영화의 것이라는 데 있다. 즉, 영화는 자기를 두 번 부정하고 있다. 주어(현실)에서 한 번, 보어(영화)에서 한 번.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A와 B가 있다. A가 말한다. “나는 B야. 그런데 B는 A가 아니야. 그러니까 나는 A가 아니야.” 이 말과, 단순히 “나는 A가 아니야.” 사이의 차이. 굳이 두 번의 부정을 통해 멀리 돌아 자신을 부정하려는 심리. A, 즉 영화의 이러한 커밍아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A는 A고 B는 B인 것을 알고 있는 제삼자 C(관객)에게 A의 이중적인 자기부정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나 같은 경우, 이런 영화의 자기부정을 현실(리얼리즘)에 천착하려 애쓰는 (근대적) 영화 문법에 대한 뒤틀린 패러디(심하게는 조롱)로 받아들였다. 그런 의미에서, <킹스맨>은 좁게는 <007>에서부터 넓게는 영화 자체에 대한 영화(오마주이자 패러디)인 셈이다.

 

3. 패기 – 실험작과 망작 사이

 

영화는 여러 번 ‘첩보물’에 대한 내 예상을 벗어났다. 즉, 첩보물의 기본적인 문법에서 벗어나 변칙적 플레이를 보여줬다. 내가 ‘패기’라는 키워드를 제시하는 것도 그 까닭이다. 해리의 죽음, 교회 씬의 모든 것(특히 음악), 다들 놀랐을 법한 머리가 폭죽처럼 경쾌하게 터지는 씬, 또한 에그시와 가젤의 대결에서 흐르는 음악, 마지막으로 어딘가 찜찜한 승리(완전한 승리라기엔 너무 많은 사람이 다쳤다.) 이 모든 것들이 내겐 충분히 강렬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감독의 입장에서 이러한 시도는 분명 무모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낯섦을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히 도전했던 감독의 패기 덕분에 이런 색다른 영화가 완성될 수 있었으리라.

 

이전에 <허삼관>에 대한 글에서도 적었던 바 있지만(<허삼관>, '감독' 하정우에 대한 첫 번째 기대와 실망), 모든 도전은 훌륭한 것이지만, 그 결과마저 무조건 칭찬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킹스맨>에 대해서 ‘색다르다’곤했지만, ‘대단한’ 영화라고 하지 않는 이유다. 아직 나는 매튜 본이 <킹스맨>을 통해 새로운 성취를 얻었는지 확신할 순 없다. 망작과 실험작은 한끝 차이기 때문이다. 둘 중 하나로 단정 짓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정성일이 실토했듯, 초기 애드리언 라인(Adrian Lyne)의 영화에 대한 그의 찬사는 나중에 주워담을 수 없는 불명예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킹스맨>에 대한 주관적인 가치판단, 더 나아가 매튜 본에 대한 평가는 잠시 미뤄두려 한다. 그의 차기작을 기다려보거나, 아직 보지 못한 전작들을 찾아봐야겠다. 그 후에야 <킹스맨>이 얻어걸린 운 좋은 ‘망작’이었는지, 뛰어난 감독의 탄탄한 ‘실험작’이었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출처: 다음영화